한줄 詩

우리도 그럴 때가 있잖아요 - 최세라

마루안 2021. 4. 10. 21:37

 

 

우리도 그럴 때가 있잖아요 - 최세라


소외에도 순서가 있었다
장애인 먼저, 그리고 노인과 병자
나는
죽어서 장례식장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질투했다

짐짝을 밀며 절뚝절쭉 화물용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메마른 뺨 같은 흙부스러기를 껴안고 문장 속을 내달리는
잡초의 군락지들 곳곳에 있었다
계절도 타지 않았다
생육조건이 같다는 이유로 잡초의 군단을 이루고 있는 나도
아버지
당신도 잡초였습니까
이따금 서광꽃 노을 빛이 물속으로 흘러들었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귤빛이 조금 옷게 만든다지만
이유없이 절실해지는 날은 내가 내 인생의 악역 배우라는 생각
그래서 어쩌면 물 속에 들어앉아
천장이거나 바닥이거나 몸을 빈틈없이 두르는 벽이거나
자루인
흐린 물 속에 들어앉아
당신을 잃었을 때 들려 오던 약한 맥박을
한 번만 다시 느껴 보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버지는 생쥐였어요
커다란 양철문이 통째로 흔들리는 슬픔이었어요
신의 심방 속엔 칼을 든 낯선 사람이 서 있다는데
타인과의 마주침
그것만이 소외의 전부인데
멀리서 사람이 와요
오네요
나는 찬 비를 맞는 보랏빛 꽃이고
언제나 음식이 나오기 전엔 즐겁게 두 벌의 수저를 꺼내고
보세요
유리에 손을 짚는다는 건 전폭적으로 뵈지 않는 단단함에 의지하는 것인데
아무도 안 올 거라는 것을 모르는
내가
이 지옥에 몰입하는 이유는
사랑
대체 사랑이 영원한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영원하지 못 해서

나이 든 오늘이 젊은 어제를 죽이는 시간입니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를 무너뜨리는 나날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잖아요

아침의 푸른 눈 안쪽에 덫을 설치해 두고
산다는 게 얼마나 아픈 일인지 손목을 물려 볼 때가 말입니다


*시집/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시와반시

 

 

 



사계(似界) - 최세라
-봄


나는 결정적으로 들킨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달라붙어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이 탔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꺼내 들었다 화약가루가 피어오르는 각자의 립스틱을

 



사계(似界) - 최세라
-여름


부탁이야 내게 금지된 품목을 가져다 줘
미지근한 물에 담가놓은 듯 잘 익은 머루눈을 가진 사람
멈춘 공기 속 혀와 살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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