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제1구역 재개발 골목 - 이철경

마루안 2021. 4. 8. 22:07

 

 

제1구역 재개발 골목 - 이철경


온기마저 잃은 쪽방 모퉁이에도 목련은 피고 지는데
독거의 아랫목은 식은 지 오래
혈기왕성했던 꽃들과 달리,
하나둘씩 생을 놓는 저 거친 삶의 종착지
고독했던 사람은 더 고독해지고
눈물지던 사람 더 큰 슬픔에 흐느끼는
인적 끊긴 봄밤의 절규가 골목마다 아우성이다

저 힘없이 고개 떨구던 꽃들은
참회의 눈물로 누군가는 서럽게 울다가
생을 놓는 일이 허다하다
제각기 변명을 바람 앞에 늘어놓으며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만,
처음 버려진 골목을 떠나지 못하는 유기견처럼
목련꽃 난자한 바닥에 깨진 달빛마저 처절하다


*시집/ 한정판 인생/ 실천문학사

 

 

 

 

 


한정판 인생 - 이철경

 

 

국가나 조직에서 입력된 명령에 따라 새벽이면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지요 저녁이면 퇴근길 한잔의 술도 할 수 있는 어느 정도 자유와, 스스로 판단하여 입력된 정보를 벗어날 수 있는 휴머니즘 로봇입니다 국가나 소속된 단체의 명령을 받아 부조리나 잘못된 명령에도 감정 없는 동료처럼 묵인하고 눈감고 귀 막은 벌레처럼 살 수 없는 한정판 로봇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몸에 기름칠하고 일용할 양식을 투입해 주던 조직의 명령도 거부할 수 있도록 입력되어 난관에 봉착하기도 합니다 나를 조종하는 조직에 사표를 던지고 로봇에게 어울리지 않는 휴머니즘에 고심하고 똑같은 사고 비슷한 사유에 대해 거부하기도 했지요 모두가 침묵하는 최상의 안정된 조직에서 나의 몸부림은 그들을 화들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은 휴머니즘이 탑재된 나의 두뇌에 바이러스가 침입하여 동료들에게 삽시간에 퍼질 거라 우려했지요 덜떨어진 완장 찬 로봇들은 길목마다 바이러스 치료제를 매설해 놓고 기다렸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합니다 휴머니즘이 탑재된 부분을 분리하여 스스로 한 단계 낮추리라 다짐하며 한정된 공간에 같은 생각 비슷한 목소리 흉내를 내 볼까 했지요 그러나 이미 바이러스가 번진 휴머니즘이 탑재된 뇌와 심장은 그것마저 거부하며 잘못된 명령을 거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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