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새점을 치다 - 안채영

마루안 2021. 4. 1. 21:23

 

 

새점을 치다 - 안채영


길모퉁이를 구부려 그 위에 앉아
구부러진 모퉁이로 날아가지도 못하는 새를 데리고
새점을 치는 사람이 있다

모퉁이 저쪽에서
점괘가 적힌 종이가 뽑혀지고
뾰족한 부리만 있는
날개가 없는 단촐한 점괘(占卦)

운세를 두고 나온 여행이었다
드나드는 문에서 모든 날개를 뽑아버렸다
부리에 갇혀 날아가지 못하는 괘(卦)에
콕콕 쪼이는 날이다

운세에 붙들린 사람들 몇이
모퉁이처럼 구경하는 새의 불안한 적중
운세를 다 퍼먹어도 흔들리는 봄

날개가 뽑혀져나간 파닥거리는 괘 하나가
아직도 뜨거운 이마를 짚고 있다
허술한 주둥이에서 쫓겨나온 목록이 펴진다
뒤적거리는 표정으로 안부는 온다
오후 근처의 점통(占桶)에서
밀린 운세를 들고 나가는 특이 사항 없는,

누군가 나의 운세를 모자처럼 쓰고 모퉁이를 돌아간다
새를 잡아다 몸에 부려놓고 싶다


*시집/ 생의 전부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오후/ 달아실

 

 

 

 

 


발화점 - 안채영


오늘 뒷산에 갔다가
은밀한 발화점을 보았다
한창 꽃송이를 흉내 내고 있었다
곧 산을 뒤덮을 것이라고
활활 태울 것이라고 했다

모든 위험은 개화가 배후인 셈인데
발아래가 온통 아찔한 와룡산 오르는 길
등산객들 지나가며 하는 말
선반 위 웅크리고 있는 봄이 닿을락 말락 하기에
뒤꿈치 살짝 치켜들자 와르르 봄이 무너졌다고
그때 짧게 꽃핀 적 있었다고 
아 그런 짧은 봄 태워보았다고
머리끝까지 물이 올라
도처의 안부가 꽃의 후음이었던 적 있었다고,

짧은 봄 흔들지 마라
죽기 직전 부르르 떨며
꽃피우는 중이니

나는 오래전에 겁도 없이
저 발화점, 꺾어 손에 쥔 적이 있다
이후로 내 손은 진달래의 온도
봄꽃의 온도를 쥐고 있게 되었다
그 이후 스스로가 발화점이 되었다
불타는 꽃잎들
산기슭에서부터 깊숙한 곳까지 번져갔지만
논둑이나 가옥으로 옮겨 붙지는 않았다
눈 끝에서 꽃의 배후에
물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시인의 말

등단 십 년 만에 첫 시집입니다.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처음으로 안착을 시도해볼 일이었습니다.

평생 말씀을 갖고 기도하듯 살아야 하는 사람,

시인은
바릿대 안에 수많은 말을 모으고 거르고
비로소 시로
다시 돌려 드리는,
증진,
말이 아니라 뜻이 중요한 삶이라
말의 탁발승일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불시착은 많았음만큼의 연습이었기에
안착이 쉬워지고 있습니다.

남녘 변방이 좋았습니다.
발화는 따뜻한 이곳 변방에서 일어나기 충분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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