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4월의 부사(副詞) - 천수호

마루안 2021. 4. 1. 21:18

 

 

4월의 부사(副詞) - 천수호


겨울에도 은행나무는 저기 서 있었다
뜨거운 입김이 잎으로 맺히는
부끄럽지 않는 4월이 올 때까지 여전히
순결 정결이라는 첫 잎의 열렬함으로
그 겨울 맨살의 부끄러움을 감추기에는 아직 잎부채가 너무 작다
과연, 가장, 매우라는 부사가 겸손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순백, 순수, 순정 이런 말놀이나 하면서 잎의 말을 열거하고 있다
4월이 더 분명해지는 이런 명사들은 신파였으므로
군데군데를 깁는 부사처럼 잎이 난 자리마다 봉합 흔적이 있다
4월의 감탄사는 어디로 발송하려는지
가지 끝 허공 한 자락에 은행잎 우표를 붙였다 뗐다 한다
열렬과 비열을 차례로 헤아리며 이파리 점괘를 짚는 것도
겨울나무에서 봄나무로 건너오는 신파의 방식이다
이 나무의 문장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 부사 같은
어린잎들이 그저 흔들리고만 있다 지금도


*시집/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문학동네

 

 

 

 

 

 

중독자(中毒者) - 천수호


그는 술상을 책상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다
이만하면 되겠지?
그는 술상에다 내 앉은키를 맞춰보았다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 빗장처럼 몸이 쉽게 들락날락했다
이만하면 몸에 잘 맞겠지?
잔뜩 신이 났다
연장이 다 있으니
술상을 책상으로 고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야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격자무늬를 넣고 말간 유리까지 얹겠다고 했고
나는 앉은뱅이라도 좋으니 들어앉기만 하면 좋겠다고 했다
열흘이면 될까 한 달이면 될까
가늠하는 날은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아직은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어도 좋았다
한 계절이면 될까 일 년이면 될까
연장을 써본 적 없어서
한 날 한 날의 대패에 밀리는 날이 길어졌다
유리와 격자무늬 사이엔 하얀 창호지를 깔고
천일홍 붉은 꽃잎도 끼워넣어야지
책을 읽다 심드렁해지면 시도 한 편 써봐야지
빈 혀의 맹세를 깨물고 침 흘리며 잠든 날이 많아졌다
술과 책은 편백나무 상 위에서 오래 삐걱거렸다
입술만 둥둥 뜬 술책은 다시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는 책으로 술을 빚는 재주가 있었다



 

*시인의 말

한동안 서울과 양평을 오갔다.
아픈 사람들이 서울에서 양평으로 건너가는 것은
칠흑의 한밤중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 몸을 건너가는 병이 구름 사이로 떠다니지 않게
병명이라는 검은 돌들을 별자리처럼 놓아본다.
이 시집이 별들을 가리키는 헛된 손가락이라 할지라도
언니를 아프지 않게 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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