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때, 우리들의 파란만장 - 이기영

마루안 2021. 3. 28. 19:09

 

 

한때, 우리들의 파란만장 - 이기영

 

 

창밖에는 잎 하나도 달지 않은 나무 한 그루

 

나무는 가장 추운 방식으로

눈보라와 마주하지

 

허기를 반죽하는 손목이 시리고

 

봄을 향해 부푸는 파일들을 딸깍, 딸깍, 하나씩 열어 볼 거야 그때 2월과 7월 날아가면서 떨어뜨린 새의 깃털보다 가벼이 떠나 버린 그녀와 그녀를 잠깐 떠올릴 거야

 

지금까지 어쩌다 12월까지 말 한마디 없이 그녀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계속해서 불면에 시달리는 밤들을 목 조르며 견디지 않겠어

 

달은 이미 다 부풀어 올랐고 이제 그만 모든 기다림을 지워야겠어 나는,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난간 - 이기영


신발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은 그곳의 계절을 몰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보라를 위로하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지점에서 이곳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제껏 이런 높이를 가져 본 적이 없어 최대한 높이 날아오르지

다리의 난간은 구름의 온도를 측정하기 좋은 곳

개새끼, 개같은 놈, 개도 안 물어 갈 놈, 개뼈다귀, 개만도 못한 놈, 개털,

목줄에 묶인 개가 무슨 죄를 지었나 수없이 들었고 수도 없이 내뱉었던 분풀이의 대상이 되었나

더 이상 개가 되지 않기 위해 개같은 날들을 지우기 위해 신발을 벗고 허공으로 뻗은 난간을 오른다

이를 악문다는 건 결심의 바깥에서 결심의 안쪽으로 솟구치는 일

날개 없이도 마지막 비상 정도는 할 수 있지

 

 

 

 

# 이기영 시인은 전남 순천 출생으로 2013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인생>,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가 있다. 2018년 김달진창원문학상을 수상했다. 여성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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