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징한 것 - 김보일

마루안 2021. 3. 28. 19:03

 

 

징한 것 - 김보일

 

 

나에게 커피는 '달다'와 '쓰다'밖에 없다

아는 커피의 이름이라고는 아메리카노 하나

수많은 와인의 종류도 내게는 그저

감당하기 힘든 외국어일뿐이다

 

돌아가신 할머니에게는 자동차가 그랬다

소나타, 그랜저, 프라이드...

굴러가고 멀미나는 것들은 모두

그냥 '차'였다

 

젊어 과부가 되고

장가도 가지 않은 두 아들을 잃은 할머니에게

아리고, 저미고, 울멍울멍한 것들은

모두 '징한 것'이었다

만질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시집/ 살구나무 빵집/ 문학과행동

 

 

 

 

 

 

봄비1 - 김보일

 

 

분홍 꽃도,

펄럭이는 치마와 도둑고양이와 이팝나무도,

빨간 자동차와 전봇대와 낡은 처마도,

술에 취한 친구의 구겨진 구두와

할머니의 리어카와

개밥그릇도

 

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살구나무 빵집 - 김보일

 

 

저녁 산책길 철길공원 한쪽에

간판 하나가 등을 달고 서 있다

 

살구나무 베이커리

 

살굿빛 식빵을 떠올리며

빵냄새가 새어나오는 안쪽을 들여다보니

앞치마를 두른 젊은 부부가 차를 마시고 있다

 

어떤 살구나무가 저들에게 이름을 떨구고 갔을까

 

살구나무도 보이지 않는데

삼월의 저녁이

초파일처럼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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