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살아남은 죄 - 이산하

마루안 2021. 3. 26. 21:48

 

 

살아남은 죄 - 이산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세상이 폭발 직전일 때
키 큰 한 젊은 노동자가 광화문 광장에서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DJ, YS를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죽을 줄 알았던 노동자가 '기어이' 소생해버리자
그들은 더이상 병원을 찾지 않았다.
박종철의 관에 또 하나의 관을 쌓아 연쇄폭발시킬
큰 호재가 사라져 내심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노동자는 살아난 것이 죄여서 30년이 지난 아직도
우울증을 앓으며 자기 몸의 불을 꺼준 사람들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고 있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운동화 한 짝 - 이산하


반쯤 창문이 열린 신촌 노고산 '이한열기념관' 유품 전시실
원래대로 복원된 바스러진 흰색 타이거 운동화 한 짝
여전히 맨 위쪽의 구멍 두 개가 끈을 넣지 않고 비어 있다.
그 윗구멍들을 비운 채 당겨 조인 다음 남은 끈을
맨 아래쪽 끈 밑으로 밀어 넣어 위쪽으로 빼낸 뒤 다시 묶었다.
맨 위쪽의 구멍들을 끈으로 조이지 않고 비워놓으면
발을 빨리 넣고 빼기는 쉽지만 그만큼 헐렁해진다.
저것은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의 벗겨진 운동화
운동화 밑창의 가로줄 물결무늬가 발등의 핏줄처럼 가파르다.
신발의 위치는 사람의 몸에서 가장 밑바닥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의 무게를 지탱하지만
피라미드 같은 세상에서는 가장 먼저 부서지기도 한다.
둘째누나의 장롱에서 기념관으로 옮겨진 이한열의 운동화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고무 밑창이 100여 조각으로 부서졌다.
낡아가는 자신을 부숴 산산조각을 내버리는 신발의 밑창
가파른 절벽과 절벽 사이로 마주 선 두 개의 신발 구멍
그 백척간두에서 도화선 같은 운동화 끈이 한 발을 내디딘다.
반쯤 열린 유품 전시실 창문이 스스로 닫힌다.

 

 

 


# 이산하 시인은 1960년 경북 영일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필명 '이륭'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한라산>,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가 있다. <악의 평범성>은 22년 만에 나온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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