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늘의 작법 - 전형철

마루안 2021. 3. 22. 22:40

 

 

오늘의 작법 - 전형철


눈물짓되 눈물 흘리지 말 것
삶의 단어로 내 선 곳에서 가장 먼 데로 찌를 던질 것
열 번을 읽어도 모르는 것은 피돌기가 맞지 않음으로 과감히 폐기할 것
관념으로 휘젓고 감각으로 쓸 것
제목과 내용은 처가와 고부(姑婦)의 거리로 정위치시킬 것
미소와 울음을 양날의 검으로 삼을 것
신(神)보다 귀(鬼)나 마(魔)와 친분을 유지할 것
태양을 피하되 촉기를 잃지 말며
취하지 않음을 경계하고 만나는 것들의 이름으르 다시 지을 것
길은 돌아가되 마주할 작은 기적을 놓치지 말 것
세 단어로 말하고 한 줄을 소중히 할 것
기한을 지키지 말고
물고기를 잡지 말며 새의 길을 따르지 말고
바다와 허공을 문신으로 새길 것
채무와 추방을 지병 삼고 장수를 포기할 것
후손을 걱정하지 말고 이 별에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소원할 것
마음에 웅덩이와 사막을 키우고
일등보다 이등을 경외하며
비극의 훈습을 겸허히 인내할 것
숲은 태워 한 줌의 재로 만들고
어둠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실전(失傳)된 비급으로 남을 것
쓰는 죄를 짓지 말고
미결수(未決囚)로 남되
형이 확정되면 자결할 것
그리고 부디
어머니의 노래를 외워 둘 것


*시집/ 이름 이후의 사람/ 파란출판

 

 

 

 



열역학 법칙 - 전형철


일요일 백반집 저녁처럼
내일은 내 생일이다

뚝배기에 담긴 찌개를 보며 생각한다

살아 있는 일은 열을 내는 것이다
식어 가는 뚝배기에게 기한을 정하는 일이다

우기를 지나온 사람의 등에 피어오르는 김처럼
한때 나도 뜨거운 자궁 속에
확확 수저질하듯 숨을 불었을 터이지만

부푼 풍선에 공기가 차츰 온도를 높이듯
곤죽이 된 몸이 언젠가 열을 내며 썩어 가겠지만

그전에 한번 스위치를 끄고 눕는 날이 있겠지
수류탄보다 뜨겁게 터질 날이 오겠지
무표정한 얼굴로, 빈 몸으로
촛불을 끌 날도 있겠지

손잡이 없는 종이컵처럼
모서리가 없어 뒹구는 뱀처럼
꼬리 긴 먼지별처럼
앞으로 나란히 닿지 않는 그 틈처럼

내일은 내 생일이다
세일 전단지 마지막 날같이


 


# 전형철 시인은 1977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고요가 아니다>, <이름 이후의 사람>이 있다. 조지훈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연성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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