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회진 - 전영관

마루안 2021. 3. 22. 22:22

 

 

회진 - 전영관


그가 오면 아침이 새뜻해진다
막연하게 자신감 생기는 것이다

능숙한 의사같이
쭈그러진 어깨를 펴주고
무릎을 칼날로 세워준다
굴종의 자세로 늘어지는 삼겹살
환멸의 증거로 널브러진 토사물
타협의 지분으로 뒤섞인 찌개 냄새들을
벤젠이라는 항생제로 치료한다
새물내 나는 옷을 곧바로 입는 것보다
어제 입었던 셔츠가 편한 까닭은
나만 편들어주는 체온이 남아서겠지
눈치가 태도로 남아서겠지

환절기에는 병원마다 감기 환자로 줄을 선다

세탁소가 벗어놓은 옷으로 그득한 것은
삶의 자세를 바꾸면 아프다는 뜻이다
품은 맞는데 기장이 짧은 미흡처럼
일상은 무언가의 트집을 무릅쓰는 일이다

물러서는 파도를 따라 잔걸음질치다가
되돌아서는 일이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보낼 때 확인했는데 배달되면 주머니마다 손 넣어본다
누구에게나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가는 악동이 있는 것처럼
실망에 실망하지 말아야지

세탁물을 들고 회진중인 그가 돌아서는 순간
풍기는  벤젠 냄새에서
휘발(揮發)이라는 망각을 생각했다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중흥사 - 전영관
-허수경 시인을 추모함


아득한 곳으로 가려는 사람처럼
산길 초입부터 신발을 바투 묶었다

한 행(行)마다 나무 한 그루씩 들여놓고
행간에 산국 향기가 채워진다
산벚과 단풍을 거느리는 갈참나무가 연(聯)을 이룬다
숲이라는 시집 시인이라는 숲
10월 끝물의 스산함을 단풍 불꽃으로 데워주고
만추의 양광(陽光)이나마 양껏 부어주는
산의 정령은 추운 사람을 안다
허수경 시인을 비다듬는 다정

부처보다 그리움이 힘세서
법당은 제쳐두고 고인 먼저 찾았다
갈잎이 구석에 몰려 부둥켜안고 있다
제가 약하다는 것을 알기에 강인한 것들
생전의 미소 같은 산국(山菊)은
보러 오라 나부대지도 않는데 사람이 스스로 찾게 한다
시인이라는 꽃의 자존심이겠지

숲이라는 만 권 시집이 절집을 둘러서 있다
바람 되어 행간을 거닐겠지 제목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겠지
더는 나이 먹지 않게 된 고인의 사진 앞에 명복을 빌려다가
시집에서 만난 것처럼 인사했다
마지막 인사 사십구재를 치른 절집에서
허수경이라는 빈자리를 되짚어보았다

영면한 자리는 독일 Alst 35번지 수목장 장례식장
염습도 않는 타국이니 먼길 추워서 어쩌나 싶어
힘껏 만추의 양광과 단풍 불꽃을 짊어졌다

 

 

 

# 전영관 시인은 충남 청양 출생으로 2011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람의 전입신고>,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슬픔도 태도가 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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