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내와 시계탑 - 전인식

마루안 2021. 3. 16. 22:07

 

 

사내와 시계탑 - 전인식


저물 무렵 역 광장
한 사내가 시계탑을 등에 메고 앉아 있다

어디에서나 삶은 고행이란 걸 미리 알아버린 듯
턱 괴고 앉은 등 뒤로 노을이
후광(後光)으로 퍼져 흐르고 있다

몇 개의 사막을 건너온 다 닳아빠진 운동화
바람이 기거하기 좋은 낡은 작업복
북서쪽에서 온 바람이 그를 알아보고 일으켜 세운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은 흔들리는 덤불숲
조금도 꼼짝 않는 몸
쓰러질 것 같은 가벼움이 세상 위에 떠 있다

말라빠진 몸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올 한 올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마다
한 눈금씩 돌아가는 시곗바늘
시계탑을 등에 멘 한 사내 턱을 괴고 앉아 있다

갈 길 바쁜 사람들 대신
역 광장 비둘기들만 우르르 모여들어
법문 듣듯 보리수나무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시집/ 모란꽃 무늬 이불 속/ 한국문연

 

 

 

 

 

 

호텔 봉정암 - 전인식

 

 

봉정암에서 딱 하룻밤이면 알 수 있네

얼마나 잘 먹고 싸고 있는지를 그것이 행이고 복인 것을

살아온 낮은 땅에서는 몰랐던 사실들

 

단무지 몇 조각을 얹은 미역국 한 대접이 왜 이리 맛이 있는지

대청 소청 아래 서너 됫박 땀 공양 아니면 이르지 못하는 곳에

절이 있는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지

오색에서 오르든, 백담에서 오르든

 

몸부림칠 수도 없이 매직펜으로 그려 놓은 한 칸 한 칸의 공간

발 고린내와 땀 냄새가 네 것 내 것 구분할 수 없어 좋은

건너 칸 사람의 발이 내 옆구리를 찌르고 옆 칸 사람 손이 넘어오는

코 고는 천둥소리에 요사채 지붕이 무너질 것 같아도

행여 꿈속에 부처님 찾아들지는 않을까

그것 하나로 쉬이 잠들 수 있는 이곳에서 하룻밤이면

내 꿈이 얼마나 호사스럽고 내 삶이 얼마나 허공 천지였는지

굳이 수미노탑에 오르지 않아도 알 수 있네

 

이곳 대청과 소청 아래에서는 누구나

꿈꾸고자 하는 것들, 이루고자 하는 것들이 다 똑같을 수밖에

그대처럼, 체 게바라처럼

 

 

 

 

*시인의 말

 

만끽하자

이 즐거운 고통

 

울며 웃을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몸속 숨어 사는 것들

홀연, 일어나 춤을 추는 그날까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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