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목화가 피어 살고 싶다고 - 정현우

마루안 2021. 3. 17. 21:46

 


목화가 피어 살고 싶다고 - 정현우


시든 억새를 쥐고 당신에게 가는 길
눈구름에 입술을 그리면 어떤 슬픔이 내려앉을까
눈사람을 만들 때 당신의 눈빛이 무슨 색으로 변할까
은색의 숲이 심장이 뛰기 시작해
몸속에 목화들이 우거져
당신에게 가는 문병은 어디로 휘어질까
마른 목화솜을 쓸어 모으면
마음엔 서리지 않는 유리 입김,
단 한번 몸과 기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살려주세요 빌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몸과 캐럴의 종이 울던 밤
솜 같은 당신을 안아보았지

한 사람을 지우기 전에 이 슬픔이 끝나기 전에
한 문장만 읽히고 있었어 사는 거 별거 있었냐 그냥,
목화가 피어 울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그래, 엄마, 잘 자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용서 - 정현우


믿지도 않은 신에게 기도했다.
텅 빈 고해소에서
쉽게 하는 고백이 있었지,
자살을 쉽게 하는 방법을 나눴고,
목을 매달아 죽는 사람, 연탄가스를 마시거나,
옥상 팔층은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아니, 불에 타 죽는 것이 가장 아프다는데
완벽하게 자살하는 방법에
까짓것, 네가 그럴 용기 있어?
나는 크게 웃었다.
네 부고를 듣고,
죄들이 손바닥 끝에서
붉고 투명한 귀들로 자랐다.
종일 두 손을 모으는 것일지도 몰라
사라지기 위해
죽음을 듣는 마음이 있어서
들리지 않는 것이 있어서
눈꺼풀을 닫으면
죽음이 필요해진다.
겨울, 불어오는 잎들이
한밤의 불면으로 들어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데,
견딜 수 있는 것들만 고통을 준다는
신은
없다.
그것은 사물의 시작
사람이 끝에 매달리는 것
불쑥 찾아와 사라지는
죄를 사해주세요.
내가 정말 그를 죽인 것 같다.
밤이 나의 비빌을 서성인다.
아프지 않게 눕는 인간의 방향으로
나는 누웠다.
죄 없는 기도가 지속된다.
신부님이 없는 고해소에서
신이 없는 고해소에서

 

 

 

 

# 정현우 시인은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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