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구마 호수 - 이강산

마루안 2021. 3. 16. 21:55

 

 

고구마 호수 - 이강산

 

 

호숫가 늙은 여인이 고구마를 캔다

 

육지의 섬 같은 호수,

꽃을 든 청년이 성큼성큼 걸어가 닻을 내린

그 언덕배기

 

한사코 호수 쪽으로만 핏줄을 대던 고구마의 태를 끊고 있다

 

밭은 어느덧 붉은 호수다

봄마다 피어나는 청년의 붉은 꽃 같은

 

호수에 발목이 잠기는 줄도 모른 채 여인은 한 뿌리, 한 뿌리 호수를 캔다

 

짐작건대 호수의 뿌리를 어루만지는 저 여인도

한때는 꽃을 품은 청년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날이 있었다

붉어지고 싶어서,

멋모르고 내 몸의 뿌리를 캐던 시절

그러나 지금은 고구마만 보아도 저절로 불어지는 때,

 

꽃을 깜박 잊고 왔는지

고추잠자리 청년 하나가 호수에 발을 담그다 떠난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이것저것 - 이강산

 

 

새벽차를 타려고 귀를 닦는데 귀에서 이것저것 소리가 날카롭다

이명과 싸우느라 청춘 다 날린 귀,

 

어라, 이것 봐라

나는 쟁강쟁강 칼날이 튀는 소리가

이명을 제거하자는 역모 같아서 귀가 솔깃한 것인데

 

귀의 텃밭에 지하실에

이것저것, 수북하다

 

이토록 많은 집착을 내 안에 쟁여놓았다니

이것들이 실은 이명의 씨앗들이 아닌지

 

나는 귀를 열고 이것저것을 털어낸다

이참에 이명의 뿌리까지 제거해 보자는 꿍꿍이로 귓속을 발칵 뒤집다가

 

아차 싶어서 귀를 닫는다

이렇게 다 비우고 나면 마침내는 내가 버려질 것 같아서

차마 내칠 수 없는 것 몇몇을 주워 들고

슬그머니 귀를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