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억척의 기원 - 최현숙

마루안 2021. 3. 8. 22:07

 

 

 

얼마전에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 중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기사를 읽었다.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더 그랬다. 남성보다 여성이 독립 운동을 더 많이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에 기록된 여성 독립운동가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고 묻혀버린 여성들이 많다는 얘기다. 이 책 <억척의 기원>도 여성들 이야기다. 저자인 최현숙 선생은 구술생애사를 개척한 사람이다. 저자가 걸어온 길에 굴곡이 많아서인지 그가 쓴 책에 나오는 사람들도 파란만장하다.

 

독립운동가나 기업인, 정치인 같은 유명인의 삶만 조명을 받는 시대에서 이런 책은 참으로 소중하다. 따지고 보면 누구의 인생이든 소중하지 않으랴. 티끌 같고 이슬 같은 인생이라지만 나는 모든 사람의 인생은 우주적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는 60대 여성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름은 김순애, 정금순, 여자 이름으로는 흔한 이름이다. 현재는 두 사람 다 여성농민회 회원으로 있다. 그러니까 농사 짓는 여성 이야기로 들리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은 제목처럼 억척스럽다.

 

한 사람은 술만 먹으면 마누라와 자식들을 때리는 아버지 밑에서 큰딸로 자랐다. 예전에는 왜 그렇게 밥상을 엎고 처자식 때리는 아버지들이 그리 많았을까. 내 어릴 적에도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우리집에 숨어 있다 자고 가던 친구가 있었다.

 

무능한 아버지 밑에서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식모살이로 밥벌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양말 공장의 공순이를 거쳐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한다. 부모 덕 없는 사람 남편 복도 없다는 말이 맞는 것인가. 남편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 무능력에다 외도까지 한다.

 

거기에다 모진 시집살이를 한다. 가난한 집 딸이라는 이유로 시어머니는 욕설과 트집으로 무시하기 일쑤다. 줄줄이 달린 시동생들 뒤치닥거리에 허리가 휜다. 징글징글한 세월을 이겨낸 60 초반의 여성 인생이 대하소설보다 더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또 한 사람의 인생은 어떤가. 무능한 남편 때문에 화장품 외판원을 거쳐 흔히 때밀이라 부르는 세신사로 일생을 보냈다. 그로 인한 직업병으로 지금도 고생을 한다. 세신사가 생각보다 고된 직업이어서 뼈가 녹는다고 한다.

 

온갖 관절이 다 아프고 햇볕을 보지 못하고 습기 가득한 환경에서 일을 하기에 피부가 문드러진다고 한다. 광부들이 진폐증이라는 직업병을 앓듯 세신사도 피부병과 관절통을 직업병으로 달고 산다. 그래도 남의 때를 밀어 자식들 먹이고 공부 시킨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식을 위해 희생한 여성의 인생을 낭비라고만 할 수 있을까. 비록 이름 없는 민초들이지만 파란만장한 두 여성이 걸어온 길이 거룩하게 느껴진다. 이 책을 읽고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억척의 기원은 세상의 어머니에게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