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안개는 끝나지 않았다 - 조하은

마루안 2021. 3. 2. 21:52

 

 

안개는 끝나지 않았다 - 조하은


어느 날
세상 끝 어딘가에 도착해 있으리라 생각했지
꼴 베던 논둑길을 지나
바람의 언덕에서 피리를 불었네
한 소녀를 향한 연정이
스치고 지나갔던 어떤 풀밭은
잠시 누워 있는 동안 빨리 사라지고
어디만큼 왔을까
한참을 두리번거려도
돌아갈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네
연밥 안에 자리 잡은 단단한 씨앗처럼
다만 햇빛 아래 익어가고 싶었는데
주점 담벼락에 쏟아내던 세상을 향한 울분 위로
흐느끼는 한 사람 보내고 주저앉아 울어버렸네
세상은 온통 안개에 덮여 있고
얼음꽃은 오랫동안 녹지 않았다네
컨베이어 벨트에 빨려든 친구의 손에는 늘
릴케의 시집 <두이노의 비가>가 들려 있었다네
목마름의 끝은 거기였냐고 묻고 싶은 밤이네
가득하고 싶던 삶은 텅 빈 채
끝나지 않은 그의 이야기
지금 어디쯤 표류해 있는지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그 언덕길 - 조하은


멀리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서 있는 곳이 다시 이 자리

오래전부터 서 있던 느티나무
이제는 공주(公州)를 한눈에 품었다

나무 아래 서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던 시간 속을 걸어본다

수업료를 주지 못하고 들일 나간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다
힘겹게 고갯길 올라서던 날

나무는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네 바퀴째 돌고 있는 내게
제 몸을 열어 연둣빛 이파리로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굵어진 나무의 허리에 기대어
어느새 하늘빛 적요 속으로 나도 함께 넘어가고

너무 오래 흔들리지 말기를

사막에서 돌아온 소년처럼
물을 담고 바람을 담아
세월 내내 여기로 걸어왔나 보다

영명학교* 언덕길


*1906년 설립된 충남 공주시에 있는 중고등학교

 

 


# 조하은 시인은 충남 공주 출생으로 2015년 <시에티카>로 등단했다. <얼마간은 불량하게>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