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을 반으로 잘라 사과처럼 먹었다 - 김태완

마루안 2021. 3. 3. 21:51

 

 

슬픔을 반으로 잘라 사과처럼 먹었다 - 김태완


슬픔은 먹는 것이다
먹먹한 입 안으로 넣어 강물처럼 가슴으로 흘려보내듯
지나온 시간들이 인화된 사진처럼 압축된 순간이 될 때
그리운 기억은 눈으로 먹는 것이다 한 끼 밥이 주는 위안처럼
너를 위로하는 그 순간에도 눈물을 밀어넣는 손길에도
내 눈물이 너를 지키는 것이다 순간의 사실들이 모진 속도에 굴복할 때
곁을 지키는 뜨거운 슬픔을 키워내는 것이다

빈 방, 들어온 달빛 사람의 소리를 먹고 고즈넉하게 누워있는 자리
여백을 깔아놓고 너와 나 사이 아픔의 중력을 가늠하고 있다
이제 나를 꺼내주오, 이제 나를 가둬주오, 매일 문을 두드리는
이 변격의 슬픔, 모진 슬픔보다 더 깊은 슬픔은 둥근 형태인가
가만히 둥근 빛을 바닥에 뉘이고
그 은밀한 속살을 반으로 싹둑 잘라 나뉘어진 슬픔을
사과처럼 울컥울컥 씹어 먹는다.
한 가득 달빛 먹은 사과 속 빈 집 같은 적막이 밖으로 나와
붉어진 달빛을 넘기는 힘
아스라한 너는 무엇이더냐.


*시집/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북인

 

 

 

 

 

 

슬플 때 추는 춤 - 김태완


어느 개업집 앞 키다리 풍선이 춤을 춘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벽에 붙은 전단지가 너풀거리며
춤을 춘다.
장날 바닥에 널려진 고추며 호박이며 오이가 옹기종기 모여
햇살 가격만큼 몸을 굴리며 춤을 춘다.
병마에 지쳐 의사의 눈빛에 매달리는 간절함이 춤을 춘다.
그렇게 못 추는 춤을 춘다.
칼바람 무쇠바람 눈물바람, 바람 먹은 나무들이
고요히 내뱉는 슬픔이 하늘거리는 승무 같다.
같은 노선에 탑승해 행선지를 나누는 빼곡한 사람들이
덜컹거릴 때마다 칼군무로 들썩일 때
꿈을 잃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음표를 움켜쥐고
묵직한 발자국을 새기며 내일로 끌려간다.
끌려온 행적들이 박자 없는 악보가 되어
오선지 밖으로 튀어오르는 춤을 출 테니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손끝에는 희망이, 시선은 간절하게
발끝 스텝은 뜨겁게
뚝뚝 눈물 끊어지게

 

 


# 김태완 시인은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신탄진에서 성장했다. 2000년 계간 <오늘의문학>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추억 속의 겨울은 춥지 않다>, <마른 풀잎의 뚝심>, <왼쪽 사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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