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하루 - 김영희
오늘을 하루씩 늘려가는 것이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커피 한 잔으로
잠 부스러기를 털어낸다 어느 작가의 생각을 몇 장 읽는다
무언가를 한 줄 써보려다 의미에 걸려 그냥 눕는다
한나절을 그냥 보내버린다 하릴없이
풍경을 바라보기 위해 문을 연다 세상이 눈부셔
다시 문을 닫는다 오후의 등뼈는 앉아서 졸기 참 좋은 구조다
무언가를 덜어내려고 머리가 기울어진다 항아리 주둥이처럼,
입을 벌리고 졸아도 쏟아내지 못한 생각들이 차오른다
그냥 한 줄 써본다
이순 고개를 넘는 길은 카카오 톡의 알림 음처럼 바쁠 일도 없다
빛나는 일은 빛나는 사람들이 빛내고 있다 그리하여
가벼운 하루를 하루씩 늘려가는 것이다
*시집/ 여름 나기를 이야기하는 동안/ 달아실
폐지 - 김영희
관절 마디를 착착 접으며
한 줌 남은 숨마저 다 빼내고
물고 있던 허공조차도 토해내고서야
손수레를 타고 가는 호사를 누린다
몸을 들썩이며 키들대는 모습이
노숙으로 지내던 골목 귀퉁이
쓸쓸함에 젖던 밤도
다 지운 모양이다
누군가의 이름 앞에 부는 바람
다 막아주고도 버려지고 잊힌 시간을
시치미 뚝 떼고 주억거린다
우주 끝까지 닿을 것 같던 생의 순간들,
길고 긴 길을 당겨 접으며
머물렀던 흔적을 지우러 가는 길
방금 눈을 뜬 꽃잎처럼
오늘 불리어진 이름만으로도 넉넉해진,
가장 아늑한 자리로 돌아가는 길
*시인의 말
아무튼 쓰는 것이다.
은유를 쓰다보면 사유가 달라지고
은유는 곧 치유였다.
이전과 다른 연결을 이루려고
쓸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건너온 여름날의 뜨거웠던 기억이나
현재의 마음을 재료로 사용하면서
미완의 내가 서성이는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존재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자꾸 무언가를 쓰게 만든다.
소용의 가치는 맨 나중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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