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젠 잊기로 해요 - 백인덕

마루안 2021. 2. 27. 21:35

 

 

이젠 잊기로 해요 - 백인덕


종이창 불빛 새는 어둑한 골목길을 내려와
늘 우리가 멈추고 떠나야 했던
우체국 앞 버스 종점
그대는 말아 쥔 신문을 흔들며 웃었지만
턱 낮은 언덕 하나 넘어가기도 전 나는 알았지.
가을 저녁 쓸쓸한 바람보다 먼저
비탈길을 올라 나중에 도착하는 종소리
나는 그대의 공명(共鳴)같은 사람이었음을.
성당으로 향한 나무 등걸에 기대어
그대를 쫓아 썰물로 밀려간 세상을 위해 축복하리.
성호를 긋고 돌아서면
나는 이내 물빛 고운 섬, 푸른 방 안에 갇히네.
갇혀 깃 작은 새가 되고
단 한 번 그대의 사람이 되어보지만
어느 날 더 높이 자랄 생을 위해
밤마다 제 잎을 버리는 검은 나무처럼
그대는 그대의 고단한 추억을 떨구리라.

나 영영 잊혀도
순간, 순간 잊힌대도
돌을 새기는 어리석음에 망가지지 않으리,
끝내 망가지지 않으리라.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 문학의전당

 

 

 

 

 

 

가라앉는 배 - 백인덕
​​

그렇게 저녁이 오고
레코드 가게 옆 식당 입간판은 쓰러져 있고
뚜껑이 반쯤 열린 술병, 낮은 휘파람
둘둘 만 신문지로 가로수 꼭대기 까마귀를 부르는데
하늘 한 모퉁이에 박힌 까만 점들
일주일 째 꼼짝 않는 트럭 밑,
어린 고양이가 흘러내린 헌 양말을 노려보는,
기다리는 사람은 내일, 내일이라고
덜 여문 벚꽃 봉우리를 자꾸 날리는데
모터를 버리고 노를 버리고
키마저 떼어버린 낡은 배 한 척,
제 그림자의 물살 속으로 조용히 가라앉는다.
멀리서 굴러온 이 빠진 돌멩이 하나,
뱃전을 때리고 우는데
그 딱딱한 울음 따라 쓰러진 입간판이 떨고
레코드 가게 노란 불빛이 명멸하는데
내일은 어디로 가야 닿을 수 있나?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림으로 남는 것.
내일, 내일이라고 또 피지 못한 목련이 날아드는데
저녁 한 가운데 가라앉는 배 후미에 앉아
검은 모자를 쓴 남자, 가죽 장갑만 벗어다 꼈다
색 바랜 구리반지만 만지작거리는데
그렇게 저녁은 영원으로 길어지고
뚜껑이 반쯤 열린 술병에서 연신 술이 새는데
나는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양 손에 과자를 쥔 아이가 지나가며 인사를 건넨다.
-아저씨 배가 다 가라앉았어요.
-괜찮아 낡은 배니까,
아이가 볼까, 뒷짐에 책을 숨긴다.
'미래의 책'은 내일, 내일이니까 괜찮아,
멀리서 복수초 꽃망울이 한꺼번에 터진다.
노랗게 물드는 그저 그런 저녁

 

 


#백인덕 시인은 1964년 서울 출생으로 한양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