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울음의 안감 - 정선희

마루안 2021. 2. 23. 21:39

 

 

울음의 안감 - 정선희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설익어 목소리가 갈라지는 울음이 있고, 색을 덧발라 속이 안 보이는 울음이 있고, 물기가 가득해서 수채화처럼 번지는 울음이 있다는 것을

 

어른이 우는 모습을 본 아이는 속으로 자란다
그날 호주머니의 구멍 난 안감처럼
울음은 움켜쥔 손아귀에서 허무하다는 걸 알아버린다
그 후 내가 만난 모든 울음은
그날 밤에 바느질된 듯 흐느끼며 이어져 있다
실밥을 당기면 주르륵 쏟아질 그날의 목록들

외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다섯 여자가 모여 앉아
울음 같은 모닥불에 사연 하나씩 쬐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모두에게 다른 사람, 몰랐던 사람이었다

 

관계란 아름답지 않은 한 줄 문장 같은 것을 붙잡고 있는 것

 

울음은 죽은 이에게 가지 않고 자신을 적시다 얼룩질 텐데
죽음을 당겨 울음의 안감으로 쓰는 거라 이해했다

그날 가장 서럽게 흐느끼던 안감, 어머니를 보며
나의 습습해진 어딘가를 쓸어본다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상상인

 

 

 

 


자발적 놀이 - 정선희


호주머니는 깊다
아이가 걸어 나간 곳에서 엄마가 들어온 곳까지다

걱정에서 놓여나 아이는 최선을 다해 놀이에 집중했어
얼굴에 한껏 비누칠을 하면 미끄러운 구름이
몸속을 흘러 나무들을 부풀렸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어 좋았어

무서운 옛날이야기에 이불을 뒤집어쓰면
빗방울이 흙탕물 뒤집어쓴 그림자처럼 쏟아지고
시소의 한쪽으로
소리로 찍힌 발자국이 높이 쌓였어

바람의 비명,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고양이 울음소리가
괴담처럼 무늬가 되었지
빗방울이 밤의 무늬로 흐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집에서 최대한 멀리 갔다가 되돌아오는 놀이를 했어

너무 빨리 커버린 구멍 난 호주머니에서
아이의 떼구르르 굴러나간 동전이 깊다




# 정선희 시인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2012년 <문학과의식>, 201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푸른 빛이 걸어왔다>,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