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밤기차 타는 새벽 - 정기복

마루안 2021. 2. 16. 21:33

 


밤기차 타는 새벽 - 정기복


문풍지가 부엉이 흉내를 냈다
초생달 젖은 장독대 정한수에는
합장한 주름이 서늘한 별빛 함께 담겼다
울타리 넘어온 바람이 육 남매를 흩어놓고
막내는 밤기차 타기 위해 시오리를 꿴다

아버지, 탄광에서 얻은 허릿병 끌고
산비탈 진흙밭 평생 팔아 사들였다
고구마 빨갛게 캐어낸 가을
한숨 섞인 소원, 삼베옷
칡넝쿨로 동여맨 채 봉긋한 밭언덕이 되셨다

살내음, 땀내음, 삭인 향내 그윽히
소울음 기적이 흔들어놓은 마당을
한 바퀴 돌아 사발의 기포로 달아붙는데,
이제 그 어떤 세월의 한기가 정한수 가득 담길까
옷깃 여미며 걷는 바람 찬 이 새벽에


*시집/ 어떤 청혼/ 실천문학사

 

 

 

 

 


어떤 청혼 - 정기복


바다 쉴새없이 뒤척여
가슴에 묻었던 사람 하나
십 년 부대껴 떠나보내고
달무리 속 대보름달
생선 속살 모래밭에
연어 같은 사람 하나 던져주었네

그대!
잘먹고 잘사는 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오빠,
다 읽었는데 전태일
그 사람 그 뜨거움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썩는다는 것이다
씨앗으로 썩어 어머니 젖가슴 닮은
봉분을 키운다는 것이다
그대,
흙 토해 기름진 흙이게 하는
지렁이처럼 살자



 

*후기

 

열아홉, 한 학년을 남긴 상태에서 학교를 때려치우며 자유롭기를 바랐다. 그 갈망의 한때 마당 한쪽에서 비바람에 떨고 서 있는 나리꽃에 시선을 떼지 못했고, 시선을 거두자마자 교복을 찢어버렸고 무작정 밤기차를 탔다. 이후 부산의 서면 뒷골목을 배회했고, 동해안 철책 전투호에서 날밤을 지새웠고, 강릉 남대천 술집을 순례했고, 마포 강변 골방에서 술에 절은 잠을 청했다. 그때 나는 자유로웠나?

 

문학이 내게 온 것은 자유였지만 내가 문학을 택한 것은 불가피한 고통이었다. 나에 대한, 사물에 대한, 사회에 대한 나의 문학적 발언은 타당한가. 또는 자유로운가? 질료에 있어서도, 음악에 있어서도, 내용에 있어서도 나는 자유에의 떳떳함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첫 시집을 묶는다. 묶음과 동시에 파산이다. 문학의 파산이고 파산의 문학이다. 벗들아 나는 파산했다. 내 구좌에 송금해다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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