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것은 재난영화가 아니다 - 손남숙

마루안 2021. 2. 9. 22:10

 

 

이것은 재난영화가 아니다 - 손남숙


미세한 먼지에 속박당하고 미세하게 삶이 균열되는 시절에 이르렀다
거룩한 공장이 우리의 즐거움을 가공할 때도 있었으나 토양은 더럽혀지고 숲은 은밀했던 보물을 피로 물들인다
걸음은 활기찼고 아름다운 아기는 계속 태어났다
힘찬 도약을 맹세하는 건물들이 위풍당당하게 풍경을 압도한다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던 남자는 누군가 목을 잡고 흔드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일을 경험한다
폐지 줍던 노인들이 사라진다
소녀들은 입마개를 하고 임산부는 외출하지 않는다
24시간 뉴스에서는 오늘의 날씨와 미세한 배후에 대응하는 자세를 알려 준다
먼지로 덮인 생활의 참사들, 달라질 장소들, 죽어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도사가 준비된다
오직 자연만이 먼지의 지옥을 걷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대지에 늘어뜨려진 회색 커튼은 주름도 없이 펼쳐지고 검은 밤에 막을 입힌다
별은 빛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깜박인다
눈에 보이지만 눈을 가려야 하고
마실 수 없지만 마셔야 하고
입을 수 없지만 피부처럼 지녀야 한다
미세하게 먹히고 있다 재앙의 숙주가 된다


*시집/ 새는 왜 내 입안에 집을 짓는 걸까/ 걷는사람

 

 

 

 

 


의심하는 사회 - 손남숙


밥상에 올라오는 고등어를 의심해야 한다
암 발병률이 세계 최고다
일본산 명태가 러시아 산으로 둔갑했다
일어난 일은 추적하여 의심해야 한다
일어날지도 모를 정서적 도발과 미확인 물체도 의심해야 한다
뒤통수는 늘 의심해야 한다
수억 개의 세포들이 뛰놀고 있는 내 몸도 의심해야 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불투명하므로 의심해야 한다
구체적인 명시가 없으면 유추와 추리력을 동원하여 의심해야 한다
갈치는 의심을 지나 불특정 죄목에 걸려 있다
북한산 고사리 호두 취나물은 봉지까지도 의심스럽다
저녁의 텔레비젼은 요리 프로그램이 평정했다
방사능이 지구 몇 바퀴를 돌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누군가는 자꾸 내 머릿속을 열어 보는 것 같다
다양한 의심들이 적발되거나 급히 해동되어 돌아다닌다
세상의 모든 바다를 조사해야 한다
안방에서 녹슨 파도가 한 움큼씩 밀려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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