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화장 - 류성훈

마루안 2021. 2. 9. 22:02

 

 

화장 - 류성훈


헐벗은 어깨 위로 아낌없이 쏟아지는 건 저녁뿐
너는 깨진 이빨과 소용없는 소리들만 천천히 줍는다

이제 좀 쉬어, 어제의 운세만큼 어긋난 목덜미를 밀어 올리는, 집어넣을 것 없는 신발을 신는 그런 휴식
수고 많았고 오늘도 못 받았고 더 보내 줄 것 없는 언덕이 송전탑까기 걸어오면서

녹은 쇠에서 피어나고 그곳에서
너는 쇳물을 마실 거야
그러나 수저는 놓지 말라던

비틀어진 네가 아직도 네 이전의 무게를 불안하게 받치고 있는 날, 여긴 그만 와, 잠들고 싶은 공원의 눈앞에선 네가 세운 철근도 깨끗해 보여서

먼지바람 속에서 내년만 빛나던
라면 봉지를 보았을 때 나무젓가락이
잘못 부러졌을 때
어색한 말을 어디로도 놀리지 못하던 저녁
단단해진 네가 더 어색하게 서 있다


*시집/ 보이저 1호에게/ 파란출판

 

 

 

 

 

 

기일 - 류성훈


술을 싫어하던 당신에게
무얼 건넬지 잊은 날

침침해진 뼈들이 서로를 턴다
어두워진 건 저녁인지 눈인지
거북목의 능선이 손톱처럼 자라면
돌아갈 순 있지만 잡아 줄 손이 없어
매일 밤 길을 잃는 이승에선
타향보다 고향이 더 낯설다

가로등이 밝아 온다 고개를 들면
언제나 따가운 눈가시를
핥아서 빼 주던 당신이 서 있어
나는 5번 6번 경추가 문제였고
거기 너무 오래 앉아 있었고 그건
너무 금방 떠난 당신의
곧은 허리 덕분이었을 것이다

어묵 국물처럼 묵묵한 웃음 속에서
나는 의문만 잔뜩 물려받은 채
변온동물처럼 웅크린다 폐타이어 안에
누운 들쥐가 잠 속에서부터 말라붙듯
당신도 그랬을까 아무도 모르게
구겨진 운전석에 앉아
노골적으로 왔다 은밀하게 가는 삶들을
나는 여린 앞발로 자꾸만 휘저어 보는데

좋은 사주를 믿을 힘도 없을 때
무등을 타고
당신의 오늘을 묻는다

 

 

 

 

# 류성훈 시인은 1981년 부산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보이저 1호에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