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당신을 잊는 습관이 있다 - 최세라

마루안 2021. 2. 5. 19:56

 

 

당신을 잊는 습관이 있다 - 최세라


아무렇지 않은 각별함으로 도화지를 편다

누군가를 잊지 못한다는 것은
그 집에 볼펜을 두고 나왔다는 것

당신은 그것을 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그리다 만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선 그 볼펜이 꼭 필요한데

이곳은 레고처럼 맞춤한 세계
딱 들어맞는 세계
하얀 레고 나무가 서 있는 풍경 속에 들어가

모르는 사람의 대형견과 함께 살아 보는 것
비오는 날 몰래 물을 흘려보내 보는 것
이런 일들에 나는 익숙해져야 할 때입니다

나는 나무 대신 나무가 되고 싶어요

 

멀찍이 혼자 있을 때 내 머리카락 사이로 야맹증을 앓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나는 등에 뭇별을 가득 지고 있는 나무, 수도꼭지 틀어놓고 인디고블루 굳은 물감을 붓으로 씻어내는 온몸의 나무, 그러나 팔레트 바닥에 여전히 얼룩이 남아 있어

당신의 입술에서 하얀 문장이 날아갑니다
두 줄로 눕혀둔 노란 튜브처럼 알맞게 짝지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당신 대신 내가 되고 싶어요


*시집/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시와반시

 

 

 

 



복면 - 최세라


어떤 밤엔 어둠을 턱까지만 당겨 쓰고
나는 나도 모르는 범인이 되어 별자리를 털고 다닌다
당신의 꿈자리에 채워 넣을 크고 단단한 물방울을 훔치기 위해
나는 내 존재를 위협하며 담을 넘는다

내가 땅에 묻으면 또 나오고 또 나오는 당신
별똥별과 소원을 가리고 막으면 내 귀를 먹는 당신
내 귀가 당신을 먹는 당신

볕도 없이 흐린 낮엔
당신에게 웃음을 가져다주려고 광택을 훔치러 나선다
하늘에서 출발한 새와 땅으로 가려는 새가 나란해지는 지점에
도화선으로나 누워서
먼 발치로부터 타닥타닥 달려오는 불꽃에 나를 다 내어준다

도화선에 연결된 당신의 심장

우리 안의 별들이 폭발하는 소리

나는 당신이 사랑하지 않는 당신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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