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울 속 이사 - 김점용

마루안 2021. 1. 28. 19:35

 

 

거울 속 이사 - 김점용


용달차에 실린 화장거울이 눈발 속으로 달려간다
거꾸로 묶인 식탁의자 사이 벤자민 푸른 잎도 찰랑찰랑 딸려 간다
거울 속에도 펄펄 눈이 내린다

싸고 깨끗한 집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만리동 고개에서 마주쳤던 눈
날리는 눈송이 안이라도 따뜻한 방 한 칸 얻고 싶었는데,
부동산 유리문을 밀고 들어갈 힘이 없었다

그래, 다닥다닥 붙은 저 집들 속으로는 더 이상 들어가지 말자
고갯마루에 주저앉아 풀풀풀 날리는 눈발을 아득히 올려다보며
보이지 않는 먼 별자리를 새 주소로 삼고 싶었다

내 앞에서 나를 끌고 가는 저 화장거울은 
한 집안의 살림살이 내력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어서
이사를 할 때마다 안과 밖을 비춰 보며 누추한 기억에 흔들렸을 거다

거울의 이쪽과 저쪽은 얼마나 멀까
지금의 바깥은 어디쯤에서 안쪽이 될까
거울 밖 눈으로 제 얼굴의 흠집을 지우듯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한사코 밀어내고 있는 생의 먼 저곳을
거울은 언제쯤 끌어다가 안쪽 얼굴에다 주검꽃으로 비춰 줄 것인가

만리동 고개의 철없는 감상처럼
먼 저쪽이 있어서 이쪽을 가볍게 여길 줄도 알았는데
그건 또 그것대로 쉬운 이사는 아닐 것이다

우연히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보고서야 알게 된 이사의 이력
서른 군데도 넘게 옮긴 빽빽한 주소들이 알고 보면 다 새로운 별자리였다
거기서 살고 거기서 죽었으니
결국엔 거울을 사이에 두고 왔다 갔다 했다는 거다
거울에 부딪친 눈발이 내 어지러운 발자국을 안고 줄줄 흘러내린다
역시 바깥이 안쪽을 지운다는 거다


*시집/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걷는사람


 

 

 

 

의정부북부역 - 김점용


눈 내리는 의정부북부역 앞에서
북부역이 어디냐고 묻는다
사라진 이름
사라진 사람들
사람들은 한결같이 저 위쪽이라고 손가락질로 대답한다
그리운 북부역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부역으로 북부역으로 밀려 올라갔을까

북부역
어딘지 모르게 끝까지 밀려간 느낌
모두가 떠나간 곳에서
꿈도 바닥도 없는 곳
너의 대답도 아무 대책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모든 일이 기적이었지
첫눈 한 송이
옛날 순대국집에 피어오르던 김발
부용천변에 마른 갈잎 흔들리는 일조차
기적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었지

어느 해 초겨울
국화분을 들고
널 찾아간 적이 있었지
오뎅 국물 세 컵을 다 마실 때까지
아무도 네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지 않았어
그냥 북쪽으로만 갔다고 했지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의정부북부역이 어디냐고 물어도
사람들은 묵묵부답

아무래도 나는
좀 더 북쪽으로 가야할 것 같네

 

 


# 김점용 시인은 1965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1997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메롱메롱 은주>,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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