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치아 상태를 점검하는 오후의 진료 - 손남숙

마루안 2021. 1. 27. 21:38

 

 

치아 상태를 점검하는 오후의 진료 - 손남숙


하찮은 것을 씹고
어리석은 마음을 질겅질겅 목구멍으로 넘기느라고
반쯤 절개된 구릉과 폐허가 된 동공이 있다
이와 잇몸 사이의 내력이 숭덩숭덩하다
오직 흑백의 진술로만 기록되는 몸
놀라워라, 나의 삶은 힘들게 빠득빠득 삼키고
게으르게 외면하며 부지런하게 파멸해 왔구나
끊임없이 실패를 연마해 온 결과를
어금니 빠진 자리가 움푹하게 알려 준다
어떤 고질적인 외침이 오후의 진료를 규명하느라고
녹아내린 뼈 위에 무슨 건물을 세울 것인지
아 입을 벌리세요
뜯어낼 미래가 아직도 남아 있다니


*시집/ 새는 왜 내 입안에 집을 짓는 걸까/ 걷는사람

 

 

 

 

 

 

걷는 사람 - 손남숙


걷는 사람은 천천히 사랑하는 사람
언덕의 바람을 마시고 들판의 향기를 저장하는 사람
시간을 가만히 멈추게 하는 사람
걸음이 뒤로 밀리는 사람
걷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새 날아가는 사람

저기 지구가 간다
어서 가자 얘들아

걷는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
화사한 기억 속의 어느 날을 솜뭉치처럼 뜯어낼 수 있어
잘 봐, 손바닥 위에 풀이 돋아난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까

입김을 불어넣어 생명을 갖게 해야지
꼼틀꼼틀 올라와 햇빛 속을 걸어 다니게 할 거야
바람을 옆구리에 끼고 씩씩하게 달아나야지
봐, 저만큼 가는 걸음걸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바다를 보폭에다 맞추었어
바다 한 편을 끼고 읽는 사이 또 한 편의 파도가 걸어오는 거야

걷는 사람은 듣는 사람
숲의 미소와 바람의 가능성
바다의 기품을 닮아 가는 사람
홀로 가만히 존재하는 모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

 

 

 

# 손남숙 시인은 1964년 경남 창녕 출생으로 한국방송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1년 <갯벌> 동인, 1999년 <일과시>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시집으로 <우포늪>, <새는 왜 내 입안에 집을 짓는 걸까>가 있다. 경남작가회의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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