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파 - 이돈형

마루안 2021. 1. 28. 19:42

 

 

한파 - 이돈형


강기슭은 누가 버리고 간 회의처럼 얼음에 닿아 있다

언 강은 폐쇄된 활주로, 수면을 문질러 술렁거리게 하였다

할 수 없는 일은 스스로에게 우호적이다

언 강에 갇힌 물오리는 할 수 없는 일, 그 일에서 벗어나려 한다

아마 환기되지 않는 절망이 죽은 회의가 물오리의 목일 것이다

길들여지고 품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횡단하려는 세계를 늦게 깨우칠 때가 있다

내일 봐요, 이처럼 쉬운 이별을 물오리는 1인 시위하듯 술렁임 밖으로 밀어낸다

걱정하는 사람들이 눈발처럼 날리고 남겨진 풍경이 빠르게 얼어 갔다

조심히 다녀와, 이 흔한 말은 언제나 물 건너간 기슭에서 반질거린다

길들여지기 좋은 날이다


*시집/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걷는사람

 

 

 

 



기일 - 이돈형


내 기일을 안다면 그날은 혼술을 하겠다

이승의 내가 술을 따르고 저승의 내가 술을 받으며 어려운 걸음 하였다 무릎을 맞대겠다

내 잔도 네 잔도 아닌 술잔을 놓고 힘들다 말하고 견디라 말하겠다

마주 앉게 된 오늘이 길일이라 너스레를 떨며 한잔 더 드시라 권하고 두 얼굴이 불콰해지겠다

산 척도 죽은 척도 고단하니 산 내가 죽은 내가 되고 죽은 내가 산 내가 되는 일이나 해보자 하겠다

가까스로 만난 우리가 서로 모르는 게 많았다고 끌어안아 보겠다

자정이 지났으니 온 김에 쉬었다 가라 이부자리를 봐 두겠다

오늘은 첨잔이 순조로웠다 하겠다

 

 

 

 

# 이돈형 시인은 충남 보령 출생으로 충남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2012년 계간 <애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리는 낄낄거리다가>,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이 있다. 김만중 문학상, 애지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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