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량한 나날 - 정일남

마루안 2021. 1. 28. 19:48

 

 

무량한 나날 - 정일남


많이 걸어왔다 발병이 나도 쉬어 갈 곳이 없다
날이 저물어 새가 날아가고
내 헛기침에 내가 놀란다
고독이 여물면 몇 줄 쓴다
이런 분위기에 낮은 데로 흐르는 물소리
울적할 때 휘파람을 불어본다
가난과 슬픔이 용서되어야 하고
만져지는 것보다 만질 수 없는 것이 소중한데

자정이 지나면 어둠의 먼 곳에서
동이 트이고 발자국 소리 들려온다
개미들이 줄을 이어 행군하는 아침
나팔소리 들리고
머물다 떠난 선현(先賢)들은 한결같이
고독과 명상에 아파한 사람들이었다


*시집/ 밤에 우는 새/ 계간문예


 

 

 


사각의 방 - 정일남


붉은 벽돌로 쌓은 사각의 벽
그 속에 같혀 여기까지 왔다
나는 가난을 자처하고 재물을 탐하지 않은 죄
시마(詩魔)에 홀려 같이 놀아난 죄
객지를 떠돌며 빈처(貧妻)에게 씻을 수 없는 죄가 있다

갇힌 방을 감옥으로 바꾼 날로부터
잠은 죄수의 잠이고 옷은 수의로 바뀌었다
전동차가 산을 돌아가는 바퀴 소리가 멀어진다
하루가 저녁에 이르고 황혼이 내린다
나는 사각의 방을 뒷짐 지고 돌아다니며
무기징역을 사는 사람

밥을 먹고 죄의 시를 쓰고 자만하는 동안
신혼시절의 당신이 벽에 걸린 액자에서
미소 짓고 내려다본다

 

 

 


# 정일남 시인은 1935년 강원 삼척 출생으로 관동대 상학과를 중퇴했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당선, 198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느 갱 속에서>, <들풀의 저항>, <야윈 손이 낙엽을 줍네>, <기차가 해변으로 간다>, <추일 풍경>, <유배지로 가는 길>, <꿈의 노래>, <훈장>, <봄 들에서>, <감옥의 시간>, <금지구역 침입자>, <밤에 우는 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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