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달의 기억 - 허림

마루안 2021. 1. 27. 21:52

 

 

달의 기억 - 허림


음력은 생일이나 제사를 기억하거나
설이나 추석을 조바심 나게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
나는 자꾸만 잊어버려 가끔 어둔 밤 달을 찾는다
달 속 엄마는 쇠락하였구나
소핵교 이학년이 학력의 전부인 엄마가
오늘이 음력 며칠이냐 묻는다
나는 달력의 일진과 음력 며칠이라고
달처럼 귀먹은 엄마한테 큰 소리로 천천히 들려준다
그래 그렇게 됐구나
달이 반달쯤 됐을 거다 이맘때지
달 속 엄마는 여직 앞치마 하고 방아 찧는다
끝날 거 같지 않던 날도 죽으니 다 가더라
더디 가더라도 가는 게 날이라고
달처럼 세상의 모든 날이 기억하는
엄마의 날들을 내가 묻는다
오늘이 음력 며칠이냐
혼자 묻고 밖으로 나가 하늘의 달을 본다
그래 오늘이 음력 초닷새쯤 됐겠다
모래쯤 술밥을 쪄야겠구나


*시집/ 엄마 냄새/ 달아실

 

 




무어라는 것 - 허림


무어라도 돼라
그게 엄마의 좌우명이었다
콩나물 키워 열두 가지 반찬 만들고
아구든 아귀든 강냉이든 옥씨기든 올갱이든 고디든
먹도록 만들어 상 위에 올리는 것
그게 엄마가 할 줄 아는 전부였다
노상 소핵교만 졸업했어도
무엇이든 됐을 거라는 말
게우 소핵교 이학년도 다니다 말고
부엌떼기로 들어섰다가
위안부 소녀들 공출해 간다고
한동안 도광동에 숨어 살면서도
콧구멍이 새까맣도록 고골에 불을 피워 상을 차렸다는
그 먼 날들을 들려주며 뭐든 돼라 했는데
돌아보니 온 길도 없고
내다보니 갈 길도 아물거려
주저앉고 말았다
시인은 되는 게 아니라고
엄마는 말할 뻔했는데
뭣 땜에 그랬는지
엄마가 간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엄마도 생각이 참 많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 허림 시인의 본명은 허병직, 1988년 허림으로 이름을 바꾸고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방송국(KBS) 구성작가, 문구점 운영, 잠시 교단에 섰다가 식당을 차려 칼국수를 팔기도 했다. 여덟 권의 시집을 냈다. 지금 고향인 내면 오막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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