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웠다 - 김륭

마루안 2021. 1. 23. 19:21

 

 

그리웠다 - 김륭


내가 나를 놀라게 하거나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일에 골몰했다
또 어떤 날은 내가 나를 건드릴 수 없는 일을
찾다 보니 돌돌 말린 양말 속이었다

밤을 나눠 쓰던 애인이 나타나 뺨을 때렸다
나는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나는 전쟁이 될까 봐
기쁘고 용감한 마음을 군복처럼
꺼내 읽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달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무사히, 무사히
눈썹 하나 다치지 않게 그러나 등신, 천하에 둘도 없는
등신, 나는 오갈 데가 없었다
저 혼자 나를 떠들어대는
팬티처럼

달을 닫는다 나는, 밤은 가만히 그대로 두고

물끄러미

죽지 않았다고 사는 일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집/ 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 달을쏘다

 

 

 



떨림


울음이 울음을 밀고 있다

이미 죽었는데 아직 죽고 있다는 듯이

그때마다 눈송이, 이제 막 눈 뜬 늙은 눈송이 하나
땅에 발 내려 뭉쳐지려다 또 뿔뿔이 흩어지는
눈송이, 눈송이 뒤집어쓴 나는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눈사람을
녹이는 사람

열려라 밤, 닫히면 또 어때 중심을 잃은 내가
나를 걸어보는 이야기

말 위에 말을, 글 위에 글을, 숨을 곳이 거기밖에 없어서

다음 이야기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눈사람 검은 머릿속 가득 고인 피로 밤을 끓이듯
살 떨리는 필치로

기어코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먼저 죽은 사람

사람을 다 잡아먹은 공기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는데, 달에 숨을 붙이러 가는
울음이 있다



 

# 김륭 시인은 1961년 경남 진주 출생으로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 원숭이의 원숭이>, <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 등이 있다. 지리산문학상, 동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