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생몰연대를 적다 - 안채영

마루안 2021. 1. 22. 21:33

 

 

생몰연대를 적다 - 안채영


뒤따라오는 운구차가
백미러 속으로 따라온다
사인(死因)으로 반사된 아침 해가
한동안 같이 따라왔다
사거리를 따라오고 다리를 건너오고
휘어진 길에서 잠시 투명한 반사를 벋어나자
이내 다시 나타나며 따라오는 운구차
화장장 표지판이 나타나고

당신이 지금부터 지나갈 자리는 이젠 불길이라고
붉은 아침 해 속으로 휩싸인다.

보자기에 싸인 따뜻한 우주를 들고 보면
진화가 멈춘, 진공 행성
공기를 다 뺀 유골함은 지지부진했던 하나의 우주다
물이었다가 불이었다가
작은 바람에도 날릴 것이지만
납골장 안 칸칸을 채우고 있는
둥근 행성들은 제각각 다른
생몰연대를 갖고 있다

그깟 우주 쯤 흐려지는 일은 빈번하고
사람들은 모두 무표정한 표정으로 둥둥 떠 있다

떨어진 혀들은 여전히 밀봉해두기로 한다
평생 
몸을 바꾸는 것쯤은
바람의 사이를 지우는 일이라고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시집/ 생의 전부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오후/ 달아실

 

 

 

 

 

 

별명의 나이 - 안채영


별명에는 친구들이 많다
이름보다 더 가까운 사이들
그건 각자들이 깃든
중력과 형형들이 있다는 뜻이다

오랜 공백을 떠돌면서도
바뀌거나 가물거리지 않는
별명들도 나이가 들 때가 있겠지만
내 몸에 꼭 맞는 우주의 별들 같은 별명은
여전히 시공을 낄낄거리며
날아오르거나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름은 나이가 먹더라도
별명은 좀처럼 늙지 않는다
어쩌다 이름이 사라진 친구가
친숙한 별명으로 참석한 모임
별명은 죽지 않는다

탱자라고 불리던 친구는
뒤 한 번 힐끗 돌아보다
물고기 하느님에게로 갔단다
방생 기도 갔다가 방생되어
목사 사모님이라 주일 예배가 있는
일요일 모임에는 늘 불참이었는데 오늘은 참석했다
별명까지 전원 참석한 모임이었다

늙지도 않는 별명들이
앓고 있는 한 생을 달래주고 있었다


 

 

# 안채영 시인은 1967년 경남 진주 출생으로 201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생의 전부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오후>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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