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모란공원, 겨울 - 정기복

마루안 2021. 1. 22. 21:52

 


모란공원, 겨울 - 정기복


폭설 퍼부어도
쌓이지 못하는 도시의 진창
무릎걸음으로 지나
흰 바리케이드 칼날처럼 차단된
산 어귀에 다다릅니다

이곳은
야위게 살아도
슬픔 모르던 뜨거운 피
세상 밖으로 기꺼이 쏟아내던
시절의 수인들이 불끈불끈
허우대 썩히고 삭혀
스스럼없는 그림자로
거침없이 통방하는 동네

시린 눈발
모이 찾아 헤매던
검게 그을린 굴뚝새 몇 마리
폭설 견뎌 팽팽하게 휜
애기소나무 등에 와 앉습니다
문득 하늘 낮게 깔리고
칼바람 새들 통통통 날아오릅니다
덩달아 솔가지
활같이 튕겨올라 묵직한 겨울
퍽퍽퍽 털어냅니다 그
서슬에 온 산
쩌렁쩌렁 깨어납니다


*시집/ 어떤 청혼/ 실천문학사

 

 

 

 


모란공원, 가을 - 정기복


넋두리 판치는 세상
추태로 인한 부끄러움과
짙은 회한을 들꽃 묶어 바칩니다

지금은 메마른 단풍이 내려와
척박한 땅에 머무는 계절
한여름 내내
뜨거운 상처 다스리지 못해
몸뚱이 밀며 헤매던 까치독사
깊은 굴을 찾아듭니다

거품으로 흘린 독
길고 어둔 밤 동안
갈꽃 거름이 되고
찬 서리 속에 지새우던
나그네 앞에
독기 뿜어내는 들국화
한무더기 피었습니다


아, 떳떳한 죽음이란
끝끝내 살아낸 자만의
몫이란 걸 향기로 알겠습니다

 

 

 

 

# 정기복 시인은 1965년 충북 단양 출생으로 강릉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광주대 <대밭문학상>, 동아대 <동아문학상>을 수상했다. 1994년 <실천문학>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어떤 청혼>,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