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은 칼날을 물고 사라지고 - 박승민
칼날이 얼음을 문 건지, 얼음이 복부 깊숙이 칼날을 받아 들인건지 알 수 없는, 얼음 속에 박힌 칼날
이 세상, 정말 사랑이라는 체위가 있다면 그렇다면 말이지, 자신이 박은 건지 박힌 것인지조차 모른 채 한생을 한나절처럼 늙어가는 것
무너지는 자기를 무연고 묘지처럼 지나치다가
이제야 생각난 듯 허겁지겁, 그 옛 자리로 돌아가
타들어가던 너의 마음, 이제 알겠다는 듯, 몰라도 알겠다는 듯 천천히, 괴롭게, 천천히, 괴롭게, 고개를 끄덕이듯, 칼날인 듯 얼음인 듯 번들거리는 녹슨 마음을 내 속으로 옮겨 놓는 일
그러나 뼈대의 형식마저 녹아내린 뒤, 둘이 닿았던 기억만이 전부이자 막다른 길목일 때, 누군가 웬 녹슨 물 자국이야! 툭 치고 지나갈 때, 칼날 속에 이미 꽉 물린 빙질의 어금니와 아랫니, 녹지 않는 사랑의 세포, 젖은 흔적만으로도 가장 넓은 이야기가 솟아오르던 어떤 분수(噴水), 어쩌면 아직 내가 이 먼지 나는 공지(空地)를 못 떠나는 이유의 이유.
*시집/ 끝은 끝으로 이어진/ 창비
백골이 진토 되어 - 박승민
그는 혼자였고
혼자인 것처럼 보였고
그가 늘 혼자인 것처럼 보인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와 누이는 있었으나 없었고
밤마다 온몸을 다해 그를 붉게 안아준 건
값싼 찬이슬 몇병.
나침반처럼 자꾸 흔들리는 마음의 극점을 잡아준 건
먹어서 배고프지 않던 막걸리 두어병.
악취를 따라 들어온 지구대 소속의 흰 장갑에 들려
드디어 그가 이 세상, 꽉 찬 빛 속으로 하얗게 나오고 있다.
# 박승민 시인은 경북 영주 출생으로 숭실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 <끝은 끝으로 이어진>이 있다. 박영근작품상, 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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