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가다 - 박병란
이른 새벽 부음이었다
목이 말라 부엌 전구를 켠다
거실로 포개지는 표정 없는 빛과
건너편 집에서 새어나오는 말 없는 불빛
제사상에 오르는 식은 산적처럼 핏기가 없다
가기 할 뿐 오지 않는 언덕이 가깝다
오래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은 이제
귀퉁이가 맞게 잘 접어 뒤축 자른 짚신 사이에 끼워둔다
생은 이쪽과 저쪽에 놓인 숟가락처럼
엎어놓고 보면 한순간 무덤이 되어버리는 일
젓가락 한 벌처럼 다정한 오누이를 자처하며 넙죽넙죽 술을 건네는 일
비단 물 한 모금 마시는 것과 물 한 사발 떠놓는 일이 영영 못 보는 일이어서
밖에는 얼음이 얼고
우엉 달인 물 유독 달게 느껴지던 밤
언제 한번 다녀가라던 말은 달이 뜬 쪽으로 고개가 꺾인다
돌아올 수 없는 곳에서 돌아갈 수 없는 데까지
치우치지 않는 물살 디디고
빈 발우 하나 떠내려 보내듯
꿀꺽, 마지막 안부가 문턱을 넘어간다
*시집/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 북인
이별유감 - 박병란
살구빛 부겐베리아 회벽을 타고 멀리 매달려 있다
꽃잎 차양이 꽃잎을 받치고 높다
나뭇가지 뒷면에 빨판을 세운 기억들이
벽을 뚫고 나오는 건 별안간이다
스러지는 기억을 고정시킨 추락 같은 거다
소멸은 구토를 수반하기 전까지 증상이 없다
오래 앓던 너를 화장(火葬)하고 돌아오는 길
생각하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생각은 꽉 차고
버릴 것도 없는 것이 또 생겨나
뛰어내릴 밧줄을 단단히 조이고 나면
추락에도 연습이 필요했던 것일까
나뭇잎을 멀리한 꽃잎만 쾅쾅하다
그것은 그것대로 나를 버린 빛깔들이다
외로움의 맞은편에는 늘 둘이 웃고 있다
내가 견뎌야 할 것과 걷어차야 할 것들
외로움은 어디서부터 달라붙은 도깨비풀 같아
그 많던 꽃이 빈 벽에 헛발질을 하기 시작했다
# 박병란 시인은 경북 포항 출생으로 2011년 계간 <발견>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내는 안의 해,라는 기별이라지요>,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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