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좋은 시집 하나를 만나 며칠째 눈이 호강을 했다. 최세라 시집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다. 두 번째 시집에서 제대로 내 마음을 훔쳤다. 지방에서 나온 시집이다. 시집이 안 팔리는 시대에 이런 시집 만나기 쉽지 않다.
많은 것들이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판에 출판계라고 예외가 아니다. 시와반시는 대구에 있는 출판사로 최근 좋은 시집을 꾸준히 내고 있다. 최세라 시집도 모 시인의 시집을 읽고 나서 찾게 되었다.
이런 때는 시집 뒤편에 실린 기존에 나온 시집 목록이 큰 도움이 된다. 행여 지나친 시집은 없는지, 묻혀 있는 시인을 발견해 알아 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최세라 시집이 그랬다. 쏟아지는 시집들 중에서 눈 크게 뜨고 지켜보지 않는 한 놓치기 십상이다.
최세라 시의 특징은 매끄럽게 읽히지는 않지만 묘한 매력이 있다. 내가 이런 류의 시를 좋아하는 편이라 반복해서 읽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아니 첫탕보다 재탕에서 뽀얀 국물이 우러나오는 사골국처럼 두 번째 읽을 때가 더 좋았다.
세 번째쯤 되면 시인의 의도가 짐작이 된다. 두 번째에서 이 사람 시를 참 잘 쓰는구나 했다가 세 번을 읽으면 이 사람 천상 시인일 수밖에 없겠구나 했다. 시를 잘 쓴다는 느낌은 첫 시집부터 그랬다. 그 느낌이 두 번째 시집에서 감동으로 변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내가 완벽했다면 당신을 사랑하겠습니까
*이번 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아니면
(...) 다음 생이라는 저주를 간신히 피하기
상큼한 청포도를 떠올릴 때처럼 시를 읽다 보면 침이 고이게 하는 문장이 여럿이다. 이 시집에는 관행처럼 붙어 있는 해설이나 발문이 없다. 그의 첫 시집의 해설을 썼던 김익균 평론가는 그랬다. 시집에서 해설이 사라진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문화적 현상일 것이다.
해설 대신 마지막에 실린 짧은 산문이 그래서 인상적이다.
*詩作이라는 헛수고
오늘을 살지 말고 어느 날을 살기. 그리고 헛수고하는 자신에 대해 놀라지 않기. 남이 읽어도 좋을 정도의 일기란 세상에 없다. 가장 부끄러운 비밀을 진한 심으로 채워 나간다. 그것이 시가 아닐까, 라고 적어 보았다가 지우고는 다시 어두운 생각의 계단을 내려 간다. 백짓장처럼 서 있는 문을 밀면 언제나 문장 밑을 떼 지어 달려가는 들소 떼가 있다.
시인이 자서에서 <나의 말은 어둡고 혀는 둔탁하다>고 했던 것처럼 달달한 시에 익숙한 사람은 최세라의 시가 다소 불편할 수 있다. 미디어와 SNS에 넘쳐나는 달착지근한 과잉 정보가 얼마나 우리를 비만하게 만들던가. 인생도 음식처럼 쓴맛을 알면 단맛이 배가 된다. 쌉싸름한 최세라의 시가 좋은 이유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무수한 타인과 겹쳐지는 눈물겨운 최세라, 수많은 최세라가 스쳐가지만, 페이지를 덮을 때쯤이면 아낌없이 시와 불태운 최세라, 한 명의 시인만이 또렷하게, 오롯이 남아 빛을 발한다. 시를 쓴다는 자체가 전복이고 황홀인, 시인 최세라! *김상미 시인의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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