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껌 씹는 염소 - 조우연

마루안 2021. 1. 17. 21:41

 

 

껌 씹는 염소 - 조우연

 

 

껌을 씹다가 뺨을 맞아본 사람은 안다
번쩍, 섬광으로 빛나는
외로움의 발화점을

 

사각의 하악 구조를 한 사람들의 밑바닥에는
쓸쓸이라는 씹던 껌이
쩌억, 눌러붙어 있음도 안다

 

풀밭의 검은 염소가 몇 시간째 껌을 씹고 있다
반추동물처럼
고독의 고삐에 묶여서

너 역시 몇 시간째 땡볕 아래서 우울거리고 있지

 

사는 게 이렇게 질기다네, 질겅

슬퍼서 건방져진 표정을 후려 맞아도
멈추지 말아요, 질겅

 

염소가 입을 오므려 풍선을 분다

팽팽히 긴장한 풍선이 퍽 하고 터졌을 때
너는 그만 어두운 표정을 들키고 만다

들켜버린 표정은 함부로 뱉어선 안 되지

상처는 오래 씹어서는 안 되고
잘 싸서 버릴 것

질겅!


*시집/ 폭우반점/ 문학의전당

 

 

 

 

 


약국(藥國) - 조우연

 

 

아픈 자가 이 나라의 일개 서민들이다.

그들은 아프지 않은 날이 없으므로 약 없이는 살 수 없다. 환절기 감기부터 근육통, 생리통부터 치통까지 약국의 약 없이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약국에서는 안 아픈 자가 지배자다.

그들은 약의 공급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권력을 유지한다. 한번은 약값 인상으로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언론은 약물 오남용과 금단현상으로 인한 일시적 폭동이며 공권력 강화를 연일 떠들어댔다. 금식에 들어간 고공농성자의 얼굴이 누랬다. 영양제 투입이 시급했지만, 그는 끝내 투약을 거부했다.

 

강원도 태백 어디에 모여 과감히 정부가 주는 약을 끊고 자연적 치유를 도모하는 무리의 소문도 들렸다. 산야초를 뜯어 약재를 만들어 팔기도 하는데, 되레 고가라 도시민에겐 언감생심이다.

 

눈 뜨면 약을 삼킨다. 눈을 위해, 간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약발로 버티는 약국의 일개 소시민으로서 삼키고 삼키고 또 삼킨다. 부작용으로 발생하는 탈모쯤이야.

 

문제는 내성이다. 몸속의 어떤 슬픔이 약에 저항하는지 다량의 복용으로 끝내 생을 놓고 가버린 사람을 생각한다. 어떤 사회학자은 그들을 약자라, 사회적 약자라 기술했으나

 

무정부주의자, 난 그렇게 생각한다. 모두가 환상통에 끙끙대는 나라, 지금 약국은
전성기다.

 

 

 

 

# 조우연 시인은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살고 있다. 2016년 <충북작가>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폭우반점>이 첫 시집이다. <시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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