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보라 - 박윤우

마루안 2021. 1. 16. 21:42

 

 

눈보라 - 박윤우


블리자드, 물 건너온 말씀이다 자음동화가 없이도 보드랍다
바람찬 흥남부두에 흰색 한 소절 섞으면 동쪽이든 남쪽이든 눈보라 친다

제 무게만큼 고요하고 제 너울만큼 바람이 깃을 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이전부터 눈보라였던, 그 말씀 어디에 가파른 풍경이 도사려서 사납다는 누명을 뒤집어쓰나?

아버지의 술냄새 끝, 누수(漏水) 같은 잠결 속으로 막막한 것들이 막막하게 숨어드는데

지금 창밖에는 기척 없는 소란, 자세히 보면 모두 관절이 없는 것들, 전신이 통점이어서 낱낱이 흰 것들이다

선잠 든 아버지,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넘으시나 굳세어라 금순아를 외치시나 숨소리가 내리 엇박자다

전선야곡이 늦은 밤 가요무대를 적신다


*시집/ 저 달, 발꿈치가 없다/ 시와반시

 

 

 



괄호 - 박윤우


엄마 발톱을 깎는다

가위든 손톱깎이든 싹둑싹둑 잘라내도 아플 리 없는 발톱, 소갈딱지 없는 생각을 하며 엄마 발톱을 깎는다

나야, 엄마!
나야, 엄마!
엄마를 불러보는데, 아는 척 고개를 끄덕이던 엄마가 금세 또 누구시냔다

엄마가 창 너머 달을 바라보고 있다
허공처럼 앉아 달을 바라보고 있다

엄마는 용궁장(龍宮場) 난전에서 죙일 돈을 하고, 막 비린것 한 손에다 누이의 검정고무신과 내 흰운동화, 감자꽃 시린 초승달을 싸리광주리째 머리에 인 채 걷고 있는 거다
야밤 삽십 리 길을, 없는 달무리 앞세우며 없는 달무리처럼 타박타박 건너고 있는 거다

깎은 발톱 하나 달아나 하늘기슭에 사금파리처럼 박혔다

 

 

 

# 박윤우 시인은 경북 문경 출생으로 대구교육대학을 졸업했다. 초등교사 2년, 검정고시를 거쳐 중등 미술교사 10년, 대구 제3미술학원을 운영하며 미술학도들의 창의성을 20년간 망가뜨렸다. 그 죄로 7년 째 시를 쓰고 있다. 2018년 <시와반시>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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