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하루 - 함명춘

마루안 2021. 1. 17. 21:52

 

 

하루 - 함명춘


몸져누운 미래는 여전히 차도가 없고 주식은 깡통이 되고

또 내지 못한 사직서를 가슴에 묻고 돌아오는 길 기분은 착찹해지다가

낙엽처럼 차도 밑으로 한 번 더 떨어지고 납덩어릴 메단 듯

발걸음은 무겁지만 걸을수록 조금씩 내 편에 서서 바람은 불고

풀이 죽은 내 어깨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견장을 달아주며

저만큼 황혼이 어깨동무를 해줄 듯 서있고 모세의 지팡이처럼

내 발걸음 닿을 때마다 붉은 신호등에서 푸른 신호등으로

홍해같이 횡단보도가 활짝 열리는 길 끝에서 문득 뒤돌아보면

나를 위해 박수를 치듯 비둘기 떼 날아오르는, 그래도 흐린 시간보단

한 주먹 쌀만큼이라도 해가 뜬 시간이 더 많았던 하루

그래, 누군가 어디선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시집/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천년의시작

 

 

 

 



붕어빵 장수 - 함명춘


빌딩은 휘황한 골짜기에 서있는 잡목 같다

그곳에 한 점 불꽃을 달고
한 사내가 묵묵히 붕어빵을 굽고 있다

손님 하나 없는
살고 죽는 일에서조차도 비켜난
시간마저 붉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선

저 거대한 침묵 속에

사내가 하루 내내 반죽한 흰 살과 내장을 집어넣는다

조금씩 비린내가 새어 나온다
그의 손끝에서
지느러미를 꿈틀거리며 붕어들이 쏟아져 나온다

별은 하늘까지 올라가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붕어의 눈망울이다
도시의 불빛은 서둘러 지은 붕어의 거처이다

오늘 떠오른 이래 처음 웃는 달처럼

거대한 침묵 한 귀퉁이에 걸터앉은 사내가
풀어놓은 붕어들이,

차도와 인도로 골목과 골목 사이로
아가미를 빠끔거리며 헤엄치고 있다

 

 


# 함명춘 시인은 1966년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 <무명시인>,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집 - 조성순  (0) 2021.01.20
단추가 느슨해진다 - 이병률  (0) 2021.01.17
껌 씹는 염소 - 조우연  (0) 2021.01.17
동성애자 - 이수익  (0) 2021.01.16
눈보라 - 박윤우  (0) 2021.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