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새 - 김인자

마루안 2021. 1. 15. 21:19

 

 

새 - 김인자


완전한 고립을 꿈꾸며 사하라사막으로 숨어들었지
사랑에 빠져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지우고
날개가 퇴화되어 새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두 마리 새

두고 온 숲이 그리워질 때면
모래산으로 올라가 서로의 깃털을 다듬으며
흘러가는 구름에게 안부를 전하는

한때는
우리의 사랑도 저 새를 꿈꾸지 않았던가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낙타 등신 - 김인자


낙타는 허공의 붉은 바다를 무장무장 헤엄쳐갔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지붕도 문짝도 없는 길들이
돌아서면 지워지고 사라졌다
우우~ 낙타가 울었다
현생에 노마드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바람도 지쳐 쉬어가는 천막 속 온도계는 62도를 가리켰다
내 생애 비등점으로 기록될 살아있는 저 시뻘건 눈금
눈금을 확인하는 순간 땡볕에 앉아
눈 한 번 돌리지 않는 낙타 저놈은
어디가 아프거나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구나 했다
낙타는 달궈진 프라이팬 같은 모래 위에 제 몸을 구우며
무슨 죄 그리 많아 말도 안 되는 고초를
신음 한 번 내지르지 않고 부동으로 견디는 것인지
나는 낙타를 향해 삿대질에다 야유까지 퍼부었다
저 등신, 등신 같으니라구!
그 말끝에 한 남자가 씨익 웃으며 지나갔다
낙타의 원죄까지는 알고 싶지도 않지만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닌 낙타가
종일 하체를 접고 불 속에서 눈만 깜빡거렸다
말도 안 되게 지독한 놈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맛이 간 놈
나는 그렇게 단정 짓고 투항하는 자세로
무너진 허리에 파스를 붙이며 저녁이 오기를 기다렸다
밤이 오기도 전에 아침을 기다리는 일은 얼마나 무모한가
그럴지라도 끝내 낙타를 미워하지 못한 건
언젠간 찰박찰박 걸어서 나를 오아시스로 데려다 줄 그가 아닌가
떠날 생각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으나
만월이 떠올랐을 때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여기서 생이 정지되어도 좋겠단 꿈을 꾸었다
늦은 밤 미치지 않으면 목숨 부지할 수 없노라 누군가 속삭였다
나 역시 정신줄 놓쳐 예까지 왔노라 고백했다
귀신처럼 바람의 말을 알아듣는 낙타
얼마나 많은 낙타의 눈물이 소금을 만들었을까
그 밤 나는 낙타보다 열 배는 더 등신 같은 한 사내를 생각했다
수만 개의 보석이 걸린 하늘은 죽음보다 환했다
우우 바람이 모래를 나르는 소리, 여우 우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날 이후 내 몸에는 사하라의 검은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 김인자 시인은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겨울 판화>, <나는 열고 싶다>, <상어떼와 놀던 어린 시절>, <슬픈 농담>, <당신이라는 갸륵>이 있다. 여러 권의 여행 산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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