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 발 고라니 - 김유석

마루안 2021. 1. 8. 22:06

 

 

세 발 고라니 - 김유석


발자국 하나를 어디 두었을까.  

간밤 텃밭을 다녀간
좀도둑의 흔적을 더듬는 노인의 몸이
자꾸 한쪽으로 기우뚱거린다.

그놈 같은데.

서너 해 전
밤눈이 올무처럼 둘러치던 외딴집
철사줄에 발목 하나를 두고 간 그놈.

제 발모가지 물어 끊고
눈밭에 생혈 적시며 사라진 그 녀석이
발자국 하나 공중에 들고서

다시 사람의 집을 찾은 것은,

봄동 앞을 망설이다
뜯지도 않고 돌아선 것은
배고픔보다 곡진한
천식 앓는 노인의 기침소리였을까.

사람과 짐승 사이
텃밭과 야생 사이
사라진 발자국 하나

지팡이 절룩이며 찍어 넣는 노인.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상상인


 

 

 

 

행자 - 김유석


낙타가 사막을 건너는 것은 그 걸음에 있다.

광막할수록 느릿느릿 걷는 법,

모랫바람에 쓸려도 서둘지 않고 자그시 눈을 내린 채 타박거린다.

자신을 지치게 만드는 건 자신의 울음뿐, 울음도 짐이어서

꾸리는 행장 속에 걸으면서 버려야 할 것은 없다.

출렁이는 한 통의 물동이를 진 듯한 걸음걸이로

먼 길을 땋는다.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 건

사막 건너 또 다른 사막이 놓여 있기 때문,


 

 

# 김유석 시인은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상처에 대하여>, <놀이의 방식>, <붉음이 제 몸을 휜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