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얘야 나는 그만 살고 싶구나 - 피재현

마루안 2021. 1. 8. 21:41

 

 

얘야 나는 그만 살고 싶구나 - 피재현


아버지는 죽었어요 어느 날,
얘야 나는 그만 살고 싶구나
아버지는 엄마를 끔찍이 사랑했는데요
가령 엄마는 꼼짝 안 하고도 살 수 있었지요
반찬도 사다 주고 은행도 잔칫집도 아버지가 다녔지요

엄마는 그래서 밭에서 부엌으로 난 길만 알면 됐지요
아버지가 얼마나 끔찍이 엄마를 사랑했는지
가령 아버지 죽고 엄마는 은행 가는 길을 몰라
밭에다 구덩이를 파고 돈을 묻었어요
어떤 날은 그 돈을 파내 처음으로
읍내 마트에 두부를 사러 갔지요

어느 날 엄마는 아버지에게 버럭 화를 내며 이혼을 요구했어요
아버지는 나이 팔십에 무슨 이혼이나며
억울하고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동구 밖을 서성였지만
엄마는 나에게 말했지요
얘야 컨테이너라도 좋으니
나 혼자 살 집을 알아봐 주지 않겠니?

아버지는 죽었어요 이제 다 귀찮아졌다
엄마는 드디어 혼자 살게 되었는데요
엄마는 좋겠다 싶었는데요
아버지 죽고 삼 년 만에 엄마가 죽었어요

니 아부지 있을 때는, 니 아부지 있을 때는
말끝마다 이러더니 겁에 질린 어린아이의 눈빛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고 죽었어요
얘야 혼자 사는 게 무섭구나 밤에는 더 무섭구나


*시집/ 원더우먼 윤채선/ 걷는사람

 

 

 

 



엄마는 불쑥 - 피재현


새댁 때 엄마 사진 한 장 가지고 다닌 적 있었지
가지고는 다녔지만 꺼내 보지는 않았지
엄마는 내 가슴속에 내 바지 주머니에
지갑의 거처를 따라
옮겨 다니며 여러 해를 살다가
지갑이 나를 떠나갈 때 함께 따라갔지

엄마는 그때 떠났어야 했어 분실물이 되어 떠돌아도
당분간, 외로워도 당분간,
사진이 귀한 때였으니까
하얀 저고리를 차려입었겠지
읍내까지 아부지 뒤를 졸졸 따라갔겠지

행여 잃어버릴까 봐 엄마는 아부지의 중절모만 쳐다보며
사진관 속으로 들어갔겠지
행여 그때, 잃어버렸으면 신작로를 좀 더 걸었겠지
배가 고파 좀 쓸쓸했겠지

엄마 사진 잃어버리고 묵은 사진첩을 뒤진 적 있었지
이쁜 엄마는 거기 없었지.
신작로를 따라 어디까지 걸어갔는지
얼마나 오래 분실물 서랍 속에 들어 있었는지
엄마는 불쑥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지

 

 

 

# 피재현 시인은 1967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99년 계간 <사람의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는 시간>, <원더우먼 윤채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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