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울이라는 거울 - 유기택

마루안 2021. 1. 6. 22:01

 

 

우울이라는 거울 - 유기택


화장실 벽에는 좀 크다 싶은 우울이 걸려 있다

초로의 사내가 그 앞에서 머뭇거리다 돌아섰다

픽서티브로 고정되지 않은 사내를 손으로 쓱 문지르고
세면대 앞에서 공들여 손금을 닦아낸 뒤로였다

우울이라는 거울의 건너편

뭉개진 사내가 싱겁게 모두 흘러나갈 때까지
세면대에서 검은 물이 빠져나가는 소리를 귀 기울였다

우울이 환하게 켜지며 들어왔다 나간 가벼운 경련
검은 오줌 소리 가벼운 한숨과 노동을 벗은 사내의 몸

창문이 없는 그래서 과장된 물 내리는 소리
갑자기 어딘가 조금 막힌 게 틀림없어 보였다

고양이 아홉 목숨 같은
사내가 고요해지고 나서 우울이 아주 캄캄해졌다
아주 사라지는 건 없지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어쩌면 강아지라고 말하는 쪽이 옳다

다음 우울이 갑자기 벌컥 켜질 때까지
문고리처럼 환하게 엎드려 너를 자꾸 참아보는 것


*시집/ 호주머니 속 명랑/ 북인

 

 

 

 

 

 

실족 - 유기택


여러 해 전 겨울
비계 작업을 하던 인부가 추락했다

꽤 알던 형이 죽었다

집 앞 학교 체육관 보수작업이
겨울 공사가 이틀째 이어지고 있다

가끔 들리는 땅울림이 불편하다
찌르르하고 등줄기를 일으켜 세운다

연일 내다보아도 별일은 없다

인부들이 허공에 발판을 매고 있다
거미처럼 악착스러운 길을 놓는다


내 속에서 실족하는 소리가 들렸다

죽음이 금지된 지 여러 달 지났다
벌이가 생기는 일은 좀해선 드물다

망치질 한번씩으로 허공을 조이는
오늘 저들의 생은 다소 안전하다

여기서도

언젠가, 나도 한번은 허공을 매다
안전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유기택 시인은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랐다. 시집으로 <둥근 집>, <긴 시>, <참 먼 말>, <짱돌>, <호주머니 속 명랑>이 있다.  2018년 강원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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