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순정한 시간 - 이강산

마루안 2021. 1. 3. 19:47

 

 

순정한 시간 - 이강산


원앙여인숙 간판에 불이 켜졌다
목 꺾인 늙은이가 하나둘씩 달방으로 들어간다

역전 통 뒷골목, 인력시장 채소전
그 뒷골목

여인숙 간판들이 붉은 기지개를 켜는 저녁
퇴근길의 동태와 열무와 순대국밥이 일제히 목장갑을 벗고 지폐를 센다

천 원짜리 지폐를 한 장, 한 장 펼쳐서 세고
지폐의 머리를 돌려 다시 센다

마치 이렇게 해야만 하룻밤이 무사하다는 것처럼
지폐를 넘기는 고요한,
순백의 몰입

그 손놀림을 훔쳐보자니
아주 오래전 내게도 저와 같은 풍경이 있었다

눈 내리는 장터 바닥이었다
톱 장수 아버지의 가마니 위에 쭈그리고 앉아 지폐를 세던 어린 날

장돌뱅이 역마의 습작이 눈사람처럼 쌓이던
순백의 밤,
내게 그처럼 순정한 시간은 다시 없었으니

그 추억의 지폐를 넘기는 밤마다 내 생의 달방에 깜박이던 것들이란
저 여인숙 간판 같은 불빛이었는지 모른다
순정한 시간의 불빛이었는지 모른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장미여인숙 - 이강산


졸졸 따라붙는 삐끼 노파에게 달방 월세는 얼마요, 했더니 18만 원, 하는데 엄마, 고마워, 손 뽀뽀를 날리며 노파 곁을 지나는 여자를 힐끗, 바라보니 3만 원, 한다

정선 동백여인숙보다는 비싸고 청량리 천일여인숙보다는 싸다

어디서든 장미 한 다발 값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