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생은 가엾다 - 허연

마루안 2020. 12. 31. 21:28

 

 

생은 가엾다 - 허연


중국집에서 혼자
단무지를 씹으며 생각했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 저녁
기억의 판화로 남은
제행무상의 보살들을 생각했다

5.18 나던 해 광주로 전학 간
점집에 살았던
아이는 지금도 노래를 잘할까
소풍날 흑백사진은
지금도 웃는데
병 때문에 하루 걸러 학교에 못 왔던
그 아이는 지금 살아 있을까
살아서
그 소풍을 기억할까

꼬리연 잘 만들던 전쟁고아 아랑
파편에 맞아
흉 진 얼굴에 다리 불편했던 아랑
키워주던 어른 죽고
앵벌이에게 끌려갔다는
그는 어떻게 됐을까
사랑도 미움도 없이 성자처럼 죽어갔을까

그들도 나처럼
어느 헐한 저녁
혼자 단무지를 씹고 있을까

가여운 생을 씹고 있을까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하얀 당신 - 허연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죄는 검은데
네 슬픔은 왜 그렇게 하얗지

드물다는 남녘 강설(強雪)의 밤. 천천히 지나치는 창밖에 네가 서 있다 모든 게 흘러가는데 너는 이탈한 별처럼 서 있다 선명해지는 너를 지우지 못하고 교차로에 섰다 비상등은 부정맥처럼 깜빡이고 시간은 우리가 살아낸 모든 것들을 도적처럼 빼앗아 갔는데 너는 왜 자꾸만 폭설 내리는 창밖에 하얗게 서 있는지 너는 왜 하얗기만 한지

살아서 말해달라고?

이미 늦었지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재림한 자에게 바쳐졌다는 종탑에 불이 켜졌다
피할 수 없는 날들이여
아무 일 없는 새들이여

이곳에 다시 눈이 내리려면 20년이 걸린다

 

 

 

# 허연 시인은 1966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대학원 석사, 추계예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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