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람에게서 사람을 지우면 - 황동규

마루안 2020. 12. 12. 21:19

 

 

사람에게서 사람을 지우면 - 황동규


오래 정성 쏟아붓던 텃밭 지우듯
지우고 싶은 사람을 지우면 무엇이 남을까?
잡풀 웃자란 남새밭?
낙엽을 쓸다 바람 가버린 가로수 길?
새벽에 예고 없이 동파된 수도?

힘든 추억 하나 눅이려고 빌린 외딴집
새벽에 눈 그치고 물이 그친다.
물 데우는 일 거르고 눈 가득 담긴 마당으로 나간다.
흐린 하늘 아래 눈 쌓인 언덕배기 하나
가까운 신기루처럼 떠 있다.

문득 탁탁탁 소리, 눈가루가 뿌려 올려다보니.
붉은색 검은색 흰색 회색 그리고 갈색 조금,
색색으로 그러나 튀지 않게 옷 입는 새 하나가
나무 위 단색 공간에서 눈을 털고 있다.
'아 오색딱따구리!'
누군가 함께 감탄하는 기척 있어 주위를 둘러본다.
뵈진 않지만 그 누군가도 나처럼 손 내밀어 눈가루 받으며
나무 위룰 올려다보고 있다.
다시 뿌려지는 눈가루, 딱따구리 탁탁탁.
'탁탁, 오래 같이 떠돈 사람 마음에서 지우면
지워진 사람 어디 가 떠돌겠나?
눈으로 눈이 지워지겠나? 탁탁탁.'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첫눈 내리는 저녁 - 황동규


기다렸는가? 첫눈 내리는 저녁이다.
여름 가을 거치며 거칠어진 햇빛이
저 혼자 놀다 훌쩍 가버린 휑한 어스름 속으로
문득 희끗희끗 날리는 눈송이들,
아직 한 대포 아는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가로등 불빛 속에서 눈송이들이 날벌레들처럼
딸랑대는 종소리 아랑곳 않고 천천히 선회운동 하는
구세군 모금함에 둘 중 하나가 지폐 한 장 넣고
후에도 몇 번 들르긴 했지만 첫눈 내릴 때면
늘 추억 문에 조그만 불 새로 해 달곤 하는
30여 년 전 둘의 조그만 단골 술집에 닿는다.

문 앞에서 전처럼 눈을 털고 들어가
마침 전에 앉던 구석이 비어 자리 잡는다.
같이 늙는 여주인과는
눈인사와 짧은 몇 마디씩 주고받아
그동안 어땠냐를 끝내고
마늘 많이 발라 알맞게 구운 닭과
따끈히 데운 청주 대포를 시킨다.

두번째 잔이 반쯤 빌 때쯤
둘은 그동안 약지 않게 산 삶의 고비고비를
자랑처럼 늘어놓고 있겠지.
약지 않게 사는 게 어려웠거든.
그러다가 누가 먼전지 모르게
우리도 역시 약게 살았어, 생각에
말들을 멈추겠지.

때맞춰 발밑에서 고양이가 가르랑댄다.
닭 한 토막을 내려 준다.
새끼 고양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발밑을 파고든다.
한 토막 더 내려 준다.
이들에게 이렇게 살라 저렇게 살라 일러줄 게 있을까?
그저 빌어주자.
인간의 발밑에서 인간의 발길에 차이지는 말기를!
첫눈 소리 없이 내리는 저녁.



 

# 황동규 시인은 1938년에 평안남도 숙천에서 태어나 1946년에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했다.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악어를 조심하라고?>,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겨울밤 0시 5분>, <꽃의 고요>, <사는 기쁨>, <연옥의 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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