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골목에서 골목을 잃다 - 박구경

마루안 2020. 12. 1. 22:38

 

 

골목에서 골목을 잃다 - 박구경


벼룩시장에서 길을 잃고 막다른 골목을 되돌아 나오니
겨울비가 소름이 돋듯 내리는 쓸쓸한 거리였다

배달 오토바이 탈탈거리며 자장면 내려놓고 간 뒤
소주로 굳은 면을 푸는 신문 지면이 아찔하다

반바지에 커다란 운동화를 신은 힙합처럼
피둥피둥 건들거리는 덩치 큰 아이들이 침을 뱉는다

누런 금목걸이를 주렁주렁 단 중년의 사내가 부자로 보이던 것은
연신 흥정도 아닌 반강재 반말 투로
제 부친의 추억이 있다며 만 원짜리 지폐를 흔들고 을러대며 야코를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을 덜덜 떠는 초라한 사내는 아버지의 유품이다
지금은 시간을 다퉈서라도 팔아야 하지만
시간을 모르는 사정상의 한 점 시계

골목 속에서 또 골목을 잃고
생각을 재촉하는 건 비바람뿐만이 아니었다


*시집/ 외딴 저 집은 둥글다/ 실천문학사

 

 




골목 안 오른쪽 두 번째 국수집엔 - 박구경


이틀째 내리는 비를 피하거나 맞으며
시장 바닥을 번잡하게 지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기에는 늘 고모의 미소가 있었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위 유리 액자 속엔 아는 얼굴들이
사진사의 요구에 따라 저마다 표정을 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인생이라는 식단표가 자리 잡고 있어서

우거지탕 안 팝니다
수육도 이제는 안 합니다
가끔 안부나 전하며 살자
국수 먹으러 온 손님들에게 미안합니다

보고 싶고 애가 타는 국수맛은 이 장맛비에 어찌해야 하는가?
아프기 전에 쓴 이 글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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