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 이병률

마루안 2020. 12. 2. 22:17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 이병률


원하지 않는 일에도 운율은 있다

색깔을 구분할 수 없는 병에 걸린다면
노란색을 아무 색으로도 알지 못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색이 파란색임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아픔에도 아름다움은 있다

그리하여 그렇게 눈을 감아도
당신이 내 눈 속에 살지 못한다면

당신이 돌아다니지 못한다면

어느 낯선 골목 안쪽 햇빛 아래에
쌓인 눈이 녹고 있다면
그런데도 많은 부분이 더 녹아야 한다면

눈의 주인이 애타게 눈을 기다리던 당신이라면

삶의 구석구석까지를 돌보는 일도 고단할 터인데
당신이 눈까지 만들어야 한다면

눈을 편애하는 당신에게도 수고와 미안은 있다
구불구불한 길이 좋은 당신
감정과 열정이 희미해진 당신

너무 바싹 말라 있거나 독이 올라 있는 몸 상태를 돌보느라
당신 사정이 더 참담해진다면

당신이 누웠던 자리를 정리하다가 비늘은 보았다
잔잔히 당신이 떠날 수 있다는 가정에도 운율은 있다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부산역 - 이병률


막차를 타야 할까 타지 말아야 할까
고민하는 깊은 밤
역 앞에서 바람을 맞으며 서성이고 있는데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책장을 나부끼고 있다
언뜻 보기만 해도 책장 사이로 낙엽이
들어가기도 했다가 나오기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책을 주워들었다
우수수 낙엽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나는 책을 조금 오므렸다

이미 책장 사이로 꽂힌 낙엽들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낙엽들을 읽기 위해 나는 조금만 더 밝은 곳이 필요했다
막차를 타지 않고 부산에 남기로 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굴렁쇠와 소년 - 김재룡  (0) 2020.12.06
예술에 있어서 인간적인 것 - 윤유나  (0) 2020.12.06
무거운 겨울 - 박미경  (0) 2020.12.02
골목에서 골목을 잃다 - 박구경  (0) 2020.12.01
주기 - 홍지호  (0) 2020.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