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주기 - 홍지호

마루안 2020. 12. 1. 22:30

 

 

주기 - 홍지호


선물하고 싶은 날에는
미안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아
중얼거렸고

돌아누운 등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아
대답해주었다

달이 유독 크고 밝은 날에
언젠가 달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었지
나는 미안해졌다

우리는 무엇이 달의 모양을 바꾸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보이는 것은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은 달이 유독 크고 밝은 날이고
그런 날은 유독 그런 날이라는 것도

돌아누운 사람아
힘든 날에 비가 비처럼 오는 날에
멀리서 집이 크게 보이고 금방 따뜻해질 거 같아도
골목을 다 걸어야 비를 다 맞아야 문 앞에 설 수 있다

무엇이 등을 보이게 했는지
나는 등을 볼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생각했다
달의 뒷면

보이지 않는 것도 때때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달에 가보고 싶다고 했었지
달이 크게 보여도 유독 밝아 다 보이는 것 같아도
골목을 다 걸어야 한다

달에 살자
어떤 빛들이 달의 모양을 바꿔도
문 앞에 섰던 마음은 잊지 말자
우리는 달의 뒷면에 숨어살자


*시집/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 문학동네

 

 

 

 

 

 

목요일 - 홍지호


내일 당신이 죽을 것이라는 유언을 믿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믿지 못하다는 것은 피곤하게 합니다. 주말을 망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쉬고 싶어서 정원에 들어서자
의도와 다르게 먼저 있던 새가 날아갑니다

미안한 마음은 잠깐 들었습니다.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새는 어디로 갔을까
새는 자꾸 자리를 옮겨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아요

의심은 피곤하게 합니다
마음의 정원에 거하는
새가 된 당신은
이제 어디에서 쉬나요

새에게는 주말이 없습니다
유언은 죽음보다 먼저 온다고 들었으나

날아가는 새의 꽁무니를 보며 말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한데
아무래도 늦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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