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엇을 놓쳤을까 - 천세진

마루안 2020. 12. 1. 22:21

 

 

무엇을 놓쳤을까 - 천세진


어디에서든, 어떤 것으로든 세계가 시작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가령 앞뜰이 아니라 뒤뜰에, 장미가 아니라 수국을 심은 것으로 인해 다른 세계가 태어났으리란 걸.

늘 조삼하며 살았다. 낙엽 하나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었고, 바람이 골목을 바쁘게 달려가면 길을 비켜나 담장에 바짝 붙었고, 바람이 달려가는 서슬에 아팝나무 꽃잎들이 배고픔을 하얗게 달래주는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기도 했다.

무엇을 놓쳤을까. 장미꽃잎의 무게를 잘못 가늠했을까. 수국이 세계를 비집고 들어선 공간을 잘못 측량했을까. 그도 아니면 이팝나무 꽃잎의 수를 잘못 헤아렸을까. 집으로 돌아오면 호주머니에 담았던 사람들이 건넨 이야기를 문 앞에서 비워내곤 했는데, 깜빡 잊고 집안으로 끌어들였고, 호주머니 속 이야기들이 세계의 무게추가 기울어지도록 버섯을 잔뜩 피워 올렸을까.

세계의 문은 언제 저렇게 비틀렸을까. 삐걱대는 소음을 들키지도 않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저 비틀린 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닐까.


*시집/ 풍경도둑/ 모악

 

 

 



마음이라 부른 - 천세진


주름의 길이 더해져 가는 몸을 끌고 길을 나서려는데, 아픈 눈들이 그 길로는 가지 말라 말렸다. 아프지 않은 길이 따로 있을까 싶어, 아직은 산을 몇 개 더 옮겨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호쾌하게 웃으며 길을 나섰다.

가지 말라 말렸던 길에서 돌아와, 둥그런 달이 늦가을 햇살에 말린 호박고지처럼 여위고 여윌 때까지 먹구름처럼 앓고 있었는데, 눈썰미 좋은 이가 찾아와서는 구석구석 살펴도 아픈 곳이 없다고, 꾀병으로 먹구름 빛을 품은 것이 기이하다고 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려, 마음을 헐어낸 먹구름이 물러간 뒤에 다시 길을 나섰다가 휘파람새를 닮은 꽃을 보았는데, 꽃들 사이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기이한 일이었다. 눈으로 휘파람을 들었다고 털어놓을 뻔했다.

여윈 달의 시절만 오래 이어져, 한때나마 보름달의 시절이 있었던가 싶어 사진첩을 뒤지다가, 오래 묵은 풍경을 발견했는데,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자 머리 아닌 곳에서 종소리가 '댕댕' 울렸다.

한동안 '댕댕' 병을 앓다가, 오랫동안 읽지 않은 책을 뒤적였고, 책갈피로 만들어준 네잎클로버를 찾았는데 '마음'이라 적혀 있었다.

그걸 보고서야 여위고, 아프고, 휘파람 불던 것들이 멀리 떠났다가 돌아와 가만히 앉아 있는 줄을 알았다. 그걸 마음이라 부르는 줄 알았다.


 

 

*시인의 말

수백, 수천의 풍경이 나를 낳았다.
풍경이 낳았으므로,
내내 풍경에 갇혀 있었고,
풍경이 품었던 고질(痼疾)을 유전자로 받았다.

지혜를 엿보는 것으로는
지병(持病)만한 것이 없어서
지혜를 얻게 되었으나
병인(病人)의 지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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