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녁 변검술 - 김대호

마루안 2020. 11. 27. 21:49

 

 

저녁 변검술 - 김대호


저녁이 왔을 때
단지 몇 분만 관람이 가능한 석양이 찾아왔다
일대를 금빛으로 도금한 착시 앞에서
그 짧은 시간에 모든 죄와 회한을 고해야 한다
저 황금빛 변검술은 쇠락한 태양의 가문에만 전해지는 비법이라서
화려한 금광을 채굴해 바쳐도 배울 수 없다
석양 앞에선 모든 것이 공평해졌다
낮에 나를 괴롭힌 고약한 집착도 석양빛에 물드니 스르륵 녹았다
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지중해 연안이 금빛으로 춤을 춘다
석양의 찰나
찰나의 석양이여
죽은 자들의 안부를 전하기 위해 가장 숭고한 부위가
마지막으로 긴 띠를 이루며 길게 누웠다
죽은 자들의 안부란 생각보다 간단해서 발설하고 뭐하고 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 단막극을 관람하려고 하루를 기다리고 일생을 서성이는가
곧바로 밤이 왔다


*시집/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걷는사람

 

 

 

 

 

 

무거운 것은 왜 가벼운 것에 포함되는가 - 김대호


우리가 도착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들은 의외로 소박하다
친절은 소박하고 기도는 더 소박하다
소박하고 쉬워서 누구도 그곳에 도착할 수 없는 것
화려하고 빛나는 것을 꿈꾸는 동안
흙을 갖고 놀았던 시절은 시간 밖으로 나가 버렸다
기억은
한 끗 차이로 빗나간 기회와
운명을 담보로 투기했던 광란 근처에서만 발기한다
그때는 차이랄 것도 없는 미세한 각도였는데
지금은 두 팔을 다 펼쳐도 내 아름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각도의 행방은 묘연하다
가난해도 소박해지지 않아서 가난을 신뢰하지 않는다
친절한 것은 일몰에 걸린 노을뿐
매일 기도한다
이곳에서 이곳의 풍습에 친절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차가운 금속들을 만질 때 소박한 기분이 찾아오게 해 달라고
모든 것을 두 번씩 생각하지 않게 해 달라고

 

 

 

# 김대호 시인은 경북 김천 출생으로 2012년 <시산맥>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가 첫 시집이다. 2019년 천강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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