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 김희준 시집

마루안 2020. 11. 22. 19:41

 

 

 

아마도 기형도 시집부터였을 것이다. 유고 시집이란 말을 들으면 가슴 한쪽에 서늘함이 생긴다.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 덮어 놓고 읽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목도 유고 시집과 딱 어울린다. 책 날개에 시인의 말이 단촐하다.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요 2020년 9월 10일 김희준> 9월 10일은 시집이 나온 날이나 그는 세상에 없다. 시집은 지난 7월에 세상을 떠난 그의 49재에 맞춰 나왔다. 1994년 출생이니 스물 여섯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먹먹하다. 하늘이 시인의 재능을 질투했을까.

 

오래 전 신기섭 시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딱 이 생각을 했다. 하늘이 그의 재능을 질투해서 일찍 데려갔다고,, 2005년에 세상을 떠난 신기섭 시인도 공교롭게 스물 여섯이었다. 그는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 재능있는 젊은이였다.

 

어쨌든 이름이 남성처럼 보이는 여성 시인 김희준 유고 시집을 세세하게 읽었다. 흡인력 있게 술술 읽히는 문장은 아니다. 알쏭달쏭한 배경의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가며 읽었다. 읽을수록 묘하게 빠져드는 시였다. 반복해서 읽으니 더욱 선명하게 싯구가 각인된다.

 

참 시를 잘 쓰는 시인이구나. 첫물은 낯설지만 두물부터 단물이 나오면서 은근히 중독되는 시들이다. 특히 <아르케>, <다이달로스>, <프로크루스테스> 등 작품 제목으로 언급되는 그리스 신화의 배경을 알면 시인의 치밀한 의도를 제대로 감지할 수 있다.

 

시인의 궁극적 역할은 읽고 죽으라고 문장에 毒을 푸는 것, 독자는 시를 읽으며 解毒하는 것이다. 읽다 죽으면 더 좋고,, 그러나 쓰다 죽은 시인은 있어도 읽다가 죽은 독자는 없다. 읽기의 괴로움보다 쓰기의 괴로움이 크다는 증거다. 시를 쓰며 이 시인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래서 문학이 위대하다고 하는가. 사람은 죽어 사라졌어도 문장이 남아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럼 죽은 시인 대신에 남은 사람이 정한 이 독특한 시집 제목은 어디에서 따왔을까. <친애하는 언니>라는 제목의 시에서 왔다.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

파문된 비의 언어가 언니에게서 나왔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시, <친애하는 언니> 일부

 

그래서 이 시집 제목에는 쉼표가 들어가 있다. <므두셀라>가 들어간 긴 제목을 가진 시를 읽으며 요절한 시인의 운명이 누군가 의해 정해진 게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도 했다. 므두셀라는 900년 넘게 살았다는데 스물 여섯은 너무 짧은 것 아닌가. 시인은 요절했지만 오래 기억될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