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필름 속에 빛이 흐르게 두는 건 누구의 짓일까 - 강혜빈

마루안 2020. 11. 16. 21:30

 

 

필름 속에 빛이 흐르게 두는 건 누구의 짓일까 - 강혜빈 
​ 

눈 없는 인형을 줍는다 

맨발로 암실 속을 걸으면 
발끝에 치이는 머리들 
부드럽고 차갑다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는 일 없이 
누가 먼저 죽을까 봐 걱정할 일도 없이 

마주 앉아 찬밥을 퍼먹는 저녁 
완전해지려고 스스로 손목을 깨무는 노을처럼 
몸보다 먼저 말을 밀어내려는 식탁에서 

너는 가끔 사람처럼 군다 
내가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는 동안 

표정 없음에 대해 
배 속에서 자라는 소음들에 대해 
하고 싶음에 대해 
납작한 비둘기를 쪼아 먹는 빵 조각들에 대해 
내가 기어코 
벤치의 두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죽은 줄 모르는 것들이 생각을 가지게 되고 

잘 울지 않는 게 강한 걸까 물어보면 
참을수록 햇빛과 친해질 수 있다고 답하듯이 
산책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우울하기 때문에 
화창한 날에도 우리에겐 울 권리가 있다 

아는 일을 모르는 척 되감는 건 
한 명의 내가 지워지는 기분이 좋아서지 

우리는 서로의 네거티브, 하얘지지 않으니까 

어제 포도주를 나눠 마신 풍경과 
오늘 모르게 지나친다 


*시집/ 밤의 팔레트/ 문학과지성 

 

 

 

 

 

미니멀리스트 - 강혜빈 


나는 말들이 스스로 하고 싶어 하고 
해야만 하는 걸 하는 것의 느낌을 좋아한다. 
-거트루드 스타인 


찢어진 이불을 덮고 잤다 

오랫동안 
찢어진 마음에 골몰하였다 

깨어날 수 있다면 
불길한 꿈은 복된 꿈으로 

빛 속으로 풀쩍 
뛰어든 고라니가 무사하므로 
오래된 건물이 무너짐을 마쳤으므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므로 

기지개를 켜듯 이불의 세계는 
영원히 넓어지기 

모름지기 비밀이란 말하지 않음으로 
책임을 다 한 것으로 

어디든 누가 살다 간 자리 
어디든 누가 죽어간 자리 

오랫동안 비어 있던 서랍은 
신념을 가지게 된다 

"가끔 우리가 살아 있는 게 기적 같아" 

이 세계에서는 매일매일 근사한 일이 
무화과 스콘 굽는 냄새가 
누군가 
3초에 한 번씩 끔찍하게 

복선을 거두어 가지 않으면서 
한 줌의 사랑을 꿰매어주면서 

"혹시 사람을 좋아하세요?" 

더는 버틸 수 없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기로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하지 않아도 될 때 
긴 잠에 빠진 나를 흔들어 깨울 때 

아래층에서 굉음이 들렸다

 

 

 

 

*시인의 말

옥상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나는 다시 태어났다 

울고 싶을 땐 울자 
힘껏 사랑하자 

내가 너의 용기가 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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