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속에 빛이 흐르게 두는 건 누구의 짓일까 - 강혜빈
눈 없는 인형을 줍는다
맨발로 암실 속을 걸으면
발끝에 치이는 머리들
부드럽고 차갑다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는 일 없이
누가 먼저 죽을까 봐 걱정할 일도 없이
마주 앉아 찬밥을 퍼먹는 저녁
완전해지려고 스스로 손목을 깨무는 노을처럼
몸보다 먼저 말을 밀어내려는 식탁에서
너는 가끔 사람처럼 군다
내가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는 동안
표정 없음에 대해
배 속에서 자라는 소음들에 대해
하고 싶음에 대해
납작한 비둘기를 쪼아 먹는 빵 조각들에 대해
내가 기어코
벤치의 두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죽은 줄 모르는 것들이 생각을 가지게 되고
잘 울지 않는 게 강한 걸까 물어보면
참을수록 햇빛과 친해질 수 있다고 답하듯이
산책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우울하기 때문에
화창한 날에도 우리에겐 울 권리가 있다
아는 일을 모르는 척 되감는 건
한 명의 내가 지워지는 기분이 좋아서지
우리는 서로의 네거티브, 하얘지지 않으니까
어제 포도주를 나눠 마신 풍경과
오늘 모르게 지나친다
*시집/ 밤의 팔레트/ 문학과지성
미니멀리스트 - 강혜빈
나는 말들이 스스로 하고 싶어 하고
해야만 하는 걸 하는 것의 느낌을 좋아한다.
-거트루드 스타인
찢어진 이불을 덮고 잤다
오랫동안
찢어진 마음에 골몰하였다
깨어날 수 있다면
불길한 꿈은 복된 꿈으로
빛 속으로 풀쩍
뛰어든 고라니가 무사하므로
오래된 건물이 무너짐을 마쳤으므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므로
기지개를 켜듯 이불의 세계는
영원히 넓어지기
모름지기 비밀이란 말하지 않음으로
책임을 다 한 것으로
어디든 누가 살다 간 자리
어디든 누가 죽어간 자리
오랫동안 비어 있던 서랍은
신념을 가지게 된다
"가끔 우리가 살아 있는 게 기적 같아"
이 세계에서는 매일매일 근사한 일이
무화과 스콘 굽는 냄새가
누군가
3초에 한 번씩 끔찍하게
복선을 거두어 가지 않으면서
한 줌의 사랑을 꿰매어주면서
"혹시 사람을 좋아하세요?"
더는 버틸 수 없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기로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하지 않아도 될 때
긴 잠에 빠진 나를 흔들어 깨울 때
아래층에서 굉음이 들렸다
*시인의 말
옥상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나는 다시 태어났다
울고 싶을 땐 울자
힘껏 사랑하자
내가 너의 용기가 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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